나의 이야기

가난한 보릿고개 시절의 날들

토끼나그네 2004. 7. 9. 00:12

아! 목동들의 피리 소리들은

산골짜기마다 울려나오고

여름은 가고 꽃은 떨어지니

너도 가고 나 또한 가야지

저 목장에는 여름철이 가고

산골짝마다 눈이 덮여도

나 항상 오래 여기 살리라

아! 목동아 아! 목동아 내 사랑아.


내가 태어난 경상남도 남해군 이동면 초음리,

농사가 생업의 전부일 때 교통이 편리하고 경작 면적이 많아 생활수준이 높다고 하였고 부근 일대가 넓은 초원이었기 때문에 “새면(草面)”이라 불러 왔다. 그런데 이 마을이 음지쪽에 있었기 때문에 “초음(草陰)”으로 불렀다고 한다.


어쩌다가 이 노래를 들으면 어릴 때 소를 먹이러 다니던, 목동의 시절이 추억으로 떠오른다. 이 노래의 본고장 아일랜드나 유럽의 목동과는 너무도 다른 모습이지만 말이다.


여름방학이 되면 우리고장 목동들의 행렬은 시작이 된다. 점심을 먹고 나서 모두들 소를 몰고 마을 소유의 산(‘쇠마당’이라고들 한다)으로 가는 것이다. 우리 집은 동내의 어귀에 있으므로 안쪽에 사는 목동들이 나오면서 소리를 지르면 곳곳에서 몰려나온다.


그 당시 우리 동내가 120호 정도 되었는데 소는 약 70여 마리 된 것 같다. 목동 중에는 막 초등학교를 입학한 아주 어린 꼬마부터 고등학생이나 결혼한 아저씨도 있다. 더러는 고등고시는 아니더라도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는 수험생도 있었다.


우리 마을 쇠마당은 집에서 5리(약 2㎞) 정도 떨어진 ‘용머리 쇠마당’이다. 거기에는 옆에 광멀(광두리) 쇠마당과 쇠평(석평리) 쇠마당도 있었다.


모두들 소를 몰고 쇠마당에 도착하면 고삐를 소뿔에 감아서 소가 그 넓은 산에서 자유스럽게 풀을 뜯어 먹도록 내버려 둔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그 많은 소들을 그렇게 내버려둬도 멀리가지 않고 불러 모으기 좋도록 무리를 지어 다니며 풀을 띁어 먹는 것이다.

간혹은 아주 멀리 가버려서 밤늦게까지 불을 켜서 들고 찾으러 다니는 경우가 있기는 하지만... 대부분은 해가 어두워지면 처음 집결했던 곳으로 모여 든다.


먼저는 방학 첫날이 되어 쇠마당에 목동들이 모여들면 제일 나이가 많은 형이 순번을 정하여 집에서 간식거리를 가져오게 한다. 간식거리란 보리나 밀에 사카린을 넣어서 볶아오는데 한 서너되(3되) 된다. 2명이 한조가 되니까 방학 동안에 순번이 2번쯤 돌아오게 된다.

그래서 다음날부터 소를 풀어놓고 술래잡기나 윷놀이 등 재미있는 놀이를 하다가 간식을 나눠먹고 장소를 옮겨서 이웃마을 목동들과 자치기 시합을 한바탕 벌인다.

참 그러는 동안에 소치기 당번은 소들이 멀리가지 못하도록 이곳저곳을 살피는 일도 한다.


그리고 이런 놀이가 끝나면 몇몇은 끼리끼리 모여서 놀이를 하거나 집에서 가져온 철판으로 부침개 같은걸 부쳐 먹기도 하는데 그때는 이런 게 너무도 즐거웠다.

그리고 해질녘이 되어 수십 마리의 소가 한 줄로 나란히 행렬하는 모습은 가히 장관이 아닐 수 없다.

저녁을 먹고 나면 동네 곳곳에 짚 멍석을 펴고 모여서 이야기꽃을 피우고 술래잡기 같은 놀이로 여름 한철을 보낸다.


나는 초등학교 1학년을 마치고 읍내의 큰 학교로 전학을 갔지만 방학이 되면 꼭 할아버지 댁으로 와서 목동놀이를 하곤 했었다.

돌이켜보면 그때가 보릿고개 시절이었는데 어떤 아이는 집이 가난하여 가지고 간 간식이 짝보다 적어서 울어버린 일도 있고 또 산에서 칼로 송구(소나무 껍질)를 벗겨먹던 기억도 새롭다.


요즈음이야 농촌이 기계화되어서 소를 키우는 집이 거의 없으니 쇠마당이 숲으로 우거져 있다. 지나갈 때마다 저곳에서 나의 유년시절을 보냈는데 하는 추억에 잠기기도 한다.


얼마 전 어머님이 고구마며 감자들을 잔뜩 보내오셨다. 이런걸 받을 때마다 어린 시절이 떠오른다.


뭐냐 하면 그때는 곡식이 귀했으니 많은 집들이 무우밥, 고구마밥, 감자밥을 많이 먹었다. 물론 감자나 고구마로 한 끼를 때울 때도 많았고, 또 여름철엔 저녁을 국수로 때우는 것은 예사로운 일이었다. 국수도 부잣집은 팥을 넣어서 먹음직스럽기도 하지만...

요즈음은 별미라고 일부러 보리밥을 사먹으러 가지만 그때는 흰 쌀밥은 일 년에 한두 번 정도 먹는 별미였던 시절에 내가 살았다.


간혹 이런 어린 시절의 풍경을 우리 집 아이들에게 이야기 한다. 몇 번 반복해서 듣더니 이제는 재방송 그만하라고 그런다.

세상이 풍요로워진 반면 사람 내음이 빈곤해지는 것은 어쩌면 자연스런 현상인지도 모른다. 우리세대는 푸르른 하늘과 푸르른 풀밭과 푸르른 강가에서 사람 내음을 섞으며 살았던, 바로 자연의 풍요로움 속에서 살았던 것이다.


그 시절이 너무도 그립다. 이맘쯤 전신주의 희미한 불빛아래 모여서 모깃불 피워놓고 밤이 깊어가는 줄도 모르고 정을 나누던 시절이...

 

(이 글을 고향 친구들이 모이는 카페에 올렸더니 그 시절 같이 놀았던 쇠돌이라는 닉의 친구가 댓글로 그 용머리 쇠마당의 이야기를 더해 주어서 올립니다.)

 

토끼야 너무도 생생한 추억이다. 지덕곰탕에서 술래잡기, 진담몰에서 자치기, 동뫼등에서 진돌뻬기, 동뫼등 찬물에 사카린 타묵고 올챙이 배가되어 뒹굴던... 아!!!  꿈이여 다시한번..., 지금이 아무리 행복해도 그때를 비할소야... 요세아들 참으로 불쌍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