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년 대학 4학년 때인 9월, 지금은 그룹이 공중 분해됐지만 그때는 제법 잘나가던 대우전자에 취업이 확정되어 12월부터, 그러니까 남들보다는 조금 빨리 근무를 하던 중, 졸업하던 해인 78년 4월에 이르러서는 아무래도 그간 미련을 두어왔던 대학원 진학위해 1~2년 예정으로 고등학교로 자리를 옮겼다. 이건 순전히 연예 중에 있던 아내 주선으로 선생님이 된 거다. 사회생활 5개월 만에 직장을 옮긴 햇병아리 선생님으로...
그리고 대학원 진학을 위해 공부도, 사랑을 위해 연애도, 직장을 위해 근무도 앞뒤 가리지 않고 열심히 하는 모범생이었다.
이것저것에 충성을 다한 1년 후인 79년 1월 결혼을 했으니 아내는 사모님이 되었고 80년 진학과 함께 사표를 내고 학업에만 전념하는 학생으로 다시 되돌아갔다. 흔히들 달콤한 신혼이라고 하지만 거의 연구실에만 박혀 사는 힘든 신혼생활이었다. 그러나 소위 신혼생활을 할 때, 누구나 그러하듯이 단칸 셋방에서 오순도순인지 어쨌든 그렇게 살았다.
결혼 후 처음 맞이하는 아내의 생일은 교사시절에 있었다. 요즈음은 어떤지 모르지만 그때는 서너 달에 한 번씩 숙직을 해야 했다. 11월 그날은 토요일이 숙직이라서 퇴근을 못하고 숙직실에 있는데 아내가 저녁을 싸왔다. 풀어보니 전에 하던 것 보다 뭔가 많고 잘해왔다. 물론 아내랑 함께 먹을 참이다.
그런데 고맙다고 하고 같이 먹자고해도 먹을 생각은 않고 뭔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 듯, 뭐 그런 표정이면서 자꾸 머뭇거리는 거였다.
뭐 할 말이 있냐니까, 또 할 말은 없단다.
그럼 같이 먹자고 재촉을 해도 밥 먹을 생각은 하지 않고, 낮에 엄마(친정어머니)와 언니가 집에 와서 점심을 함께 먹었단다.
나야 대답은 당연히 아... 그랬냐고, 그런데 장모님은 갑자기 어떻게 오셨지, 그것도 처형이랑 함께... 하고 대수롭지 않은 듯 받아넘겼는데...
그런데 아내 눈에 눈물이 고이면서 울듯 울듯한 표정을 짓는다. 대뜸 그럼 어디 아파서 그러냐고, 왜 내게는 말하지 않고 친정에 먼저 알렸냐고 했더니...
그제야 하는 말이 오늘이 무슨 날인지 아직도 모르겠냐고 묻는다.
글쎄, 오늘이 무슨 날인가... 모르겠는데, 말해보라고 재촉을 하니 간신히 하는 말이 오늘이 자기 생일이라고 하지 않는가... 참, 세상에... 결혼 후 처음 맞는 아내의 생일을 이렇게 보내다니...
지금도 그렇지만 난 표정도, 말도 거짓말을 하지 못한다. 요즘도 간혹 아내가 말하지만 거짓말 못하는 순진성 때문에 지금껏 살아 준단다. 대단한 영광이다...
실은 그때까지 아내의 생일이 언제인지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다.
내가 할 말이 뭐가 있겠는가... 손을 부여잡고 미안하다는 말밖에는... 앞으로는 당신 생일은 국경일로 선포해서 전야제까지 성대하게 치르겠노라고 다짐을 하고 간신히 위기에서 벗어났다.
바꾸어서 내 생일은 지금껏 잊어먹은 적이 없다. 대부분의 아내들이 남편의 생일을 잊어먹기야 하겠는가 만은, 별나게도 내 생일은 장모님 생신 이틀 앞이기 때문에 처갓집에서도 잘 챙겨주신다.
그때 이야기로 돌아가서 장모님과 처형이 오셔서 생일은 챙겨주더냐고 묻기에 오늘이 숙직이라 어제저녁에 멋진 외식을 하고 왔다고 둘러댔다고 하였다.
그러고도 지금까지 아내의 생일을 기분 좋게 챙긴 적은 별로 없는 것 같다. 그런데 이런 무심한 남편의 행태가 한국 남성의 일반적인 현상이란 이야기를 언젠가 신문에서 읽은 적이 있는데... 실은 반성할 일이다.
그리고 또 크게 기억에 남는 사건은...
1997년으로 기억되는데 처음으로 PCS폰(016, 108, 019)이 나왔을 때이다. 그때 난 한국정보기술의 연구소장으로 있을 때인데, 우리 회사가 한국통신프리텔(KTF)의 기지국 사업에 참여했을 때라, 그해 10월 개통과 함께 관련회사에 수십 대씩 강제로 할당을 받았다. 나는 그전부터 휴대폰이 있는지라 없는 직원들한테 회사에서 업무용으로 나누어 주었고, 엔지니어인 입장에서 통신 방식이 다른 PCS폰을 시험도 해볼 겸 직원한테 배정된 것을 가지고 집으로 전화를 했다.
아내가 전화를 받기에 통화감이 어떠냐는 등 이것저것 물었더니 아내가 무슨 일이냐고 자꾸 묻는다. 그래서 이번에 새로 나온 PCS폰을 하나 샀다고 대답을 했더니, 당신은 있으니 자기에게 줄 거냐고 묻기에 그렇다고 했다.
그리고는 아까 시험 삼아 집으로 통화한 거는 잊어먹고 퇴근을 해서 집에 갔더니 PCS폰부터 내 놓으라고 한다.
아, 그것 말이지... 회사 거라서 직원한테 배당하고 말았지... 당신 뭐 휴대폰이 필요해... 하고 퉁명스럽게 말했더니... 아내는 기도 차지 않는단다.
내가 시험 삼아 통화를 했을 때 집에 친구들도 있었는데 오늘이 자기 생일이라 남편이 기념으로 휴대폰을 사가지고 온다고 자랑을 했단다.
아뿔싸... 이럴 때 아뿔싸 라고 했던가... 참으로 할 말이 없다. 물론 지금이야 새 모델이 나올 때마다 멋지고 근사한 카메라 폰으로 상납하여 너무 나갔다고 핀잔을 받기는 하지만...
그렇지만 아내의 생일을 이렇게 무심하게 흘려보낸 것만 있는 것도 아니다. 몇 번은 정말 분에 넘치는 선물을 정성껏 하여 감동받게 한일도 있다. 지금껏 26년간을 아내의 생일은 국경일로 선포한 그 마음은 조금도 변치 않고 있으니...
여보... 절대로 무심한 것이 아니니 공사다망한 남편을 너그러이 이해해 주구려...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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