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이야기

연리지(連理枝)나 비익조(比翼鳥) 같은 사랑을.....

토끼나그네 2004. 4. 27. 01:44

지극한 효성과 돈독한 부부애나 사랑을 말할 때 연리지(連理枝) 비익조(比翼)를 많이 비유한다. 그 독특한 연유를 알아보면.....


: 이을

: 이치 리, 결 리

: 나뭇가지


뜻으로는 사진의 모양과 같이 뿌리가 다른 나뭇가지가 서로 엉켜 마치 하나의 나무처럼 자라는 것으로 효성이 지극함을 나타냈으나 현재는 남녀 사이 혹은 부부애가 진한 것을 비유한다.


七月七日長生殿 (칠월칠일장생전)

夜半無人和語時 (야반무인화어시)

在天願作比翼鳥 (재천원작비익조)

在地願爲連理枝 (재지원위연리지)

天長地久有時盡 (천장지구유시진)

次恨綿綿無絶期 (차한면면무절기)


7월 7일 칠석날 장생전에서

깊은 밤 사람들 모르게 둘이서만 한 약속

원컨대 하늘에서는 비익조(比翼鳥)가 되고

땅에서는 연리지(連理枝)가 되기를 원하네

높은 하늘 넓은 땅 다할 때가 있겠지만

이 한(恨)은 끝내 끊일 날이 없다네


이 시는 당나라의 시인 백거이(白居易)가 그의 나이 32세에 황제의 친시(親試)에 합격하여 남긴 불멸의 걸작 '장한가(長恨歌)'의 마지막 구절인데 이 장한가는 당의 현종(玄宗) 황제와 양귀비(楊貴妃)의 비련(悲戀)을 읊은 시로 7언 4장 120행으로 되어 있다


현종은 등극하자마자 정치에 그의 온 정열을 쏟았었다. 허나, 현종 25년 (737), 황후 무혜비가 죽자 현종은 비탄에 잠긴 나머지 깊은 실의에 빠졌다. 이를 보다 못한 대신들은 당시 절세미인이었던 수왕(壽王)의 비인 양옥환을 현종 가까이 모시게 하려고 했다. 수왕은 현종의 셋째 아들이고 수왕비는 그의 며느리인 셈이다.


현종 28년 (740) 10월 어느 날, 현종은 겨울을 나기 위하여 화청지(華淸池)로 행차했다. 화청지는 서안에서 25㎞정도 떨어진 여산(驪山)산록에 있는 유명한 온천지로 역대 제왕이 행궁별장을 세워 휴양했던 곳이다. 대신들은 수왕비를 수행시켜 현종이 잘 보이는 곳에 앉혔다. 현종은 첫눈에 반해 그녀를 수왕과 이혼케 하여 며느리와 시아버지의 인연을 끊고 귀비로 맞아들였다. 현종 나이 63세 양귀비 나이 28살이었다.


천보 10년(751) 칠월칠석날에 있었던 일이다.


현종은 화청지에 거동하여 장생전에서 양귀비와 함께 노닐고 있었다. 이윽고 밤은 깊어 하늘에는 은하수가 아름답게 반짝이고 있건만 웬일진지 칠석의 하늘을 쳐다보고 있던 양귀비는 갑자기 흐느껴 울기 시작하였다. 현종이 왜 우느냐고 달래듯 물었으나 양귀비는 그저 울음만을 계속할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으려 했다.


이러기를 한참, 이윽고 양귀비는 눈물을 닦으면서 그녀의 심정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하늘에 반짝이는 저 견우성과 직녀성, 그 얼마나 아름다운 인연이나이까. 저 부부의 지극한 사랑, 영원한 애정이 한없이 부럽나이다. 저 부부와 같은 인연이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생각이 드나이다…….

역사에도 자주 나오지만 나이가 들면 가을 부채처럼 버림을 받는 여자의 허무함,

이런 일들을 생각하면 서글퍼 견딜 수가 없사옵니다......."


양귀비가 눈물을 글썽이며 말하는 구구절절 한 마디 한 마디가 현종의 마음을 아프게 찔렀다. 하여, 두 사람은 손을 서로 붙잡고 그들의 영원한 사랑을 반짝이는 별을 보며 맹세하였다.


"하늘에서는 비익조(比翼鳥)가 되고, 땅에서는 연리지(連理枝)가 되리라."


'비익조'는 중국 전설에 나오는 새로, 암수가 한 몸이 되어 난다는 데서 사이가 좋은 부부를 상징하고, '연리지' 또한 뿌리는 둘이지만 가지는 합쳐져 하나가 된다는 데서 부부의 깊은 애정을 상징하는 말이다. 현종과 양귀비는 이 비익조와 연리지처럼 영원히 떨어지지 않을 것을 서로 맹세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756년 안록산의 난으로 양귀비는 꽃다운 나이 39살로 죽고 그녀와 함께 거닐던 화청지도 불에 타서 폐허가 되고 만다. 현종은 비명(非命)에 간 양귀비를 잊지 못해 비통해하며 늘 이 말을 되뇌었다고 하는데 그들의 비련을 비익조와 연리지를 빌어 아름답고도 헤어질 수 없는 간절한 사랑으로 승화시켜 백거이는 노래하였던 것이다.


중국의 전설에 의하면 동쪽 바다에는 비목어(比目漁)가 살고 남쪽 땅에는 비익조(比翼鳥)가 산다고 한다. 비목어는 눈이 한쪽에 하나밖에 없기 때문에 두 마리가 좌우로 달라붙어야 비로소 헤엄을 칠 수가 있고, 비익조는 눈도 날개도 한쪽에만 있어 암수가 좌우 일체가 되어야 비로소 날 수 있다고 한다.


연리지(連理枝)는 글자 그대로「나란히 붙어 있는 나뭇가지」를 뜻한다. 곧 뿌리가 다른 두 그루의 나무가 사이좋게 합쳐진 가지가 연리지(連理枝)고 그 나무를 연리목(連理木)이라 부른다. 간혹 거대한 고목에서나 그런 경우를 볼 수 있는데 다정한 느낌이 들어 보기에도 좋다. 이처럼 '比翼'이나 '連理' 모두 그 말이 가져다주는 이미지와 같이 남녀 간의 떨어지기 힘든 결합을 의미한다.


본디 연리지의 고사(故事)는 후한 말(後漢末)의 대학자 채옹(蔡邕)에서 유래했다.

워낙 효심이 극진해 어머니가 죽고 뜰에 나무가 자랐는데 연리지가 되었다고 했다. 그래서 본디는 효심(孝心)의 상징으로 사용되었다. 그것이 다정한 연인(戀人)의 상징으로 사용되게 된 것이 바로 백락천(白樂天)의 이 '장한가'에 의해서였다.


백거이가 태어났을 때는 대당제국(大唐帝國)의 영화(榮華)가 차츰 기울기 시작했을 때였다. 그것은 현종과 양귀비의 로맨스 때문이었다. 양귀비에 빠진 현종이 정치에 뜻을 잃었던 것이다. 둘의 로맨스가 워낙 유명했으므로 그는 이 장한가(長恨歌)를 지어 노래했는데, 이 마지막 구절은 현재 화청지에 모택동의 글씨로 시비로 새겨져있는데 흥미로운 것은 모택동의 이 글씨체가 백거이와 동향인 회소스님에게 배워서 그런지 그를 많이 닮았다는 평을 받고 있다.


756년 안록산의 난으로 화청지는 불에 타서 훼손되었으며 현재의 모습으로 복구된 것은 청 나라말부터 시작하여 1958년 대규모의 문화재 복원사업을 진행하면서이다. 또한, 이곳은 1936년 12월에 서안사변(西安事變)이 일어났던 곳이기도 하다. 장개석은 장학량 (張學良)에게 공산당 토벌을 명하려 왔다가 국공합작을 주장하던 장학량에게 쫓겨 이곳에 숨어 있다가 결국 체포되어 국공합작이 이루어졌다는 사실도 흥미롭다.


한쪽이 병들어 죽기 전에 서로 붙어 한 몸이 되어서는 혼자였을 때 보다 훨씬 더 거대한 나무로 자라는 연리지는 처음에는 그저 가지끼리 맞닿아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나중에는 맞닿은 자리가 함께 붙어 한 나무로 변하게 되는 것이다.


이 연리지가 참으로 신기한 것은 비록 한 나무로 변하지만, 합쳐지기 전의 서로의 성격과 기질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흰 꽃을 피웠던 가지엔 흰 꽃이, 붉은 꽃을 피웠던 가지엔 붉은 꽃이 그대로 피어난다. 마치 서로 개성이 다른 남녀가 서로 만나 사랑을 하게 되어 일단 한 몸이 되면 서로를 인정하고 조화롭게 사는 모습을 빼닮았다고나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