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나의 노래에 대한 斷想-2

토끼나그네 2004. 4. 5. 22:29

나의 노래에 대한 斷想-2


전에 음치탈출을 위한 비상한 각오의 노력을 다한 이야기를 했으므로 오늘은 음치 탈출 전의 몇 가지 에피소드를 소개하려고 한다.


장면 하나.

70년대 까지 내가 자란 시골은 문화공간이 없었다. 읍내에 극장이 있었지만 항상 영화를 상영하는 게 아니라 명절을 전후하여서든지 농한기에만 영화가 상영되었지만 그것도 소위 시골의 부루조아 계층들이나 해당되는 공간이다.


반면에 서민층이 즐길 문화 중에는 명절에 몇몇 동네 청년회에서 주최하는 연극이나 노래자랑 대회인 콩쿠르(우리는 그냥 콩쿨대회라고 불렀다), 그리고 축구나 배구, 그네타기, 널뛰기, 씨름대회가 대부분이다. 그리고 이동 영화사나 서커스 등이 있다.


이야기는 콩쿠르와 영화다.

콩쿠르는 반주라고 해야 기타 치는 사람 한명 아니면 두 명에 사회자 한명이 전부다. 물론 상금도 걸려있다. 주로 밥솥이나 양푼 등 주방용품이다. 보통 이틀정도 열린다. 동네잔치가 열리는 것이다. 그리고 예심 같은 건 없다. 그냥 무대에 나가 부르는 것도 아니다. 참가비도 내야 한다. 기억으로 60년대에는 한 오십 원 했는지, 지금 생각해 보면 담배 한 갑 정도는 된 것 같다.


그런데 시작시간 2시간 전부터 분위기를 띄우기 위하여 돈을 받지 않고 그냥 부른다. 물론 심사 대상도 아니다. 우린 이걸 찬조 출연이라 했던 것 같다. 큰 확성기로 방송되므로 가까운 이웃 마을서도 들린다. 온 동네가 시끌벅적 하다.

이쯤 되면 인근 부락들로부터 나름대로 주먹께나 쓰다는 건달들도 다 모인다. 뿐만이 아니다. 처녀들도 동네 총각들의 호위를 받으며 오랜만의 나들이도 한다. 모르긴 몰라도 이삼백 명 정도 모여서 노는 콩쿠여서 사랑사고가 없지도 않았을 터인데도 그런 예긴 들어보지 못했다.


우리들에겐 본격적으로 들어가기 전인 이 두 시간의 찬조출연시간이 목적이다. 보통 다섯, 여섯 곡은 불러야 된다. 어떤 때는 우리 친구들만 통째로 그 두어 시간을 부른 적이 있다. 너무 유별나다 보니 그렇게 설쳐대도 말리는 사람도 없다. 난 노래를 지지리 못 부르는 음치였어도 이웃 동네를 포함해서 콩쿨대회에 빠지는 적이 거의 없었으니 이걸 어찌할꼬.


장면 둘

난 입대 연기를 했다가 1973년 6월 29일 소집되어 군대를 갔다. 나는 군대 가는 게 그렇게도 즐거웠다. 서울에 있는 친척집을 다 다니며 입대 인사를 했다. 인사도 인사거니와 용돈을 두둑이 얻는 수금을 위해서다. 그리고 시골 동네에서도 차비에 보태어 쓰라고 얼마간 돈도 준다. 난 입대하는 게 좋았으므로 우리 집에 친구들 불러다가 소위 한잔 꺾는 이별주 행사도 하지 않았다.


난 6월 29일 진주고등학교 교정에 모여 인원파악을 하고 논산으로 가는 기차에 몸을 길었다. 우리 동내 친구들도 여럿 있었지만 대부분이 초중고 동창 또는 한두 살의 선후배들이니 아는 얼굴들이다. 인솔병도 있었고 칸칸이 헌병도 동승하여 우릴 지키고 있었다.

난 거기서 예의 맹랑한 끼가 발동하여 합창을 유도하였다. 소위 사나이 노래부터 인천성냥공장아가씨 등 민망스런 노래까지 선창하며 이끌어 낸 우렁찬 합창을 거의 논산에 도착할 때 까지 했다. 정말이지 즐거운 신나는 기분이다.


논산 수용연대에서 기다리며 신체검사하는 날만 기다린다. 신체검사를 하여야 군번을 받고 훈련소로 가기 때문이다. 물론 그 중간에 적성검사도 한다. 대부분이 낮에는 청소며 사역으로 호출받아 일도 한다.


참 그때 우리 복장은 팬티 한 장만 걸친 거의 알몸으로 지낸다. 광경은 정말 볼만하다. 신체검사 집합이 있으면 어떻게든 앞에 서야 한다. 선착순이니까. 뒤에서면 그 기다린다는 게 보통 힘든 일이 아니다. 그늘도 없다. 뙤약볕에서 종일동안 줄을 서 있다는 게 보통 고역이 아니다.

또 줄을 잘못서면 앞쪽 일부분(신체검사 가능한 인원)만 제외하곤 나머진 다음날이 된다.

7월4일 줄을 서라는 집합이 있어 죽기 살기로 뛰어가 줄을 섰는데 나는 또 뒤쪽이다. 위기의 순간이다. 그런데 앞에 있는 병사가 노래를 많이, 그리고 잘 불러서 자기의 귀를 즐겁게 해 주는 놈 10명만 뽑아서 제일먼저 신체검사를 하게 해 주겠단다.

나는 그 소리가 들릴 듯 말듯 뒤쪽에 있었지만 두 손을 번쩍 들고 무조건 앞으로 뛰어나가 병사님의 귀를 확실히 즐겁게 해 드리겠다고 소리쳤다. 물어볼 것도 없이 내가 1번, 그리고 9명을 더 뽑아서 앞쪽에 앉히고 내가 노래를 불렀다.


다들 알다시피 앞에서 소개한데로 사나이 노래부터 좌우지간 이상한 별의별 노래를 계속해서 불렀더니 10곡도 다하기 전에 그만하란다. 노래도 못하는 놈이 용기가 가상하다고 머리를 한번 지어 박더니 통과하였다. 나의 군대생활은 이렇게 공식적인 막을 열었다.

신체검사를 마치고 군복을 지급받고, 입고 있던 옷은 포장을 하여 고향으로 보내고, 그리고 군번을 받고, 이렇게 군인이 된 것이다.

참 특이한 것은 대부분 지급되는 것은 훈련병 복장이지만 나를 포함하여 91명은 작대기 2개인 이등병 복장을 하고 다시 열차를 타고 어디론가 갔다.

돌이켜 보면 그 노래 덕에 최고 일주일은 군번을 먼저 받았다. 그것은 나하고 같은 날 입대한 친구가 교육대에 일주일 뒤 입교를 했으니 말이다.

나의 용감한 노래덕을 본것이다.


장면 셋

밤새 기차를 타고 간곳은 용산 용사의 집, 거기서 다시 트럭을 타고 의정부 101 보충대, 거기서 다시 트럭을 타고 경기도 청산이란 곳으로 갔다.

완전히 훈련을 받을 부대로 가는 것이다. 우리를 인솔하러 온 장병도 같이 있을 사람들이다.

트럭을 타고 가는 2시간여 동안 또 내가 탄 트럭에서 노래를 선창하며 좌중을 휘어잡았다.

같이 가는 동료들은 싫어도 싫다고 할 입장이 안 된다. 그리고 인솔 장병은 군기도 들게 하고 막을 이유 또한 없으니 내가 하는 대로 내버려 둔다. 그런데 다행이도 내 차에 인솔했던 그 병장은 우리 훈련소대의 내무반장이 되었다.


내가 도착한곳은 정문에 육군 간부교육대라고 쓰인 거창한 이름이었다. 우린 그곳에서 16주간의 교육을 받고 병장의 계급장을 달고 예하 부대의 분대장이 되는 뽑고 뽑은 그리고 뛰어난 정예 요원이란다. 지금 와서 말이지만 남들은 이것을 물병장이라고 한다.

30명씩 소대를 배치하고, 난 2소대가 되었는데 소대를 가르자마자 아까 차량 인솔자인 그 병장이 내무반장이므로 트럭타고 오면서 눈여겨봤던 유별난 나에게 향도를 하란다. 사실 쫄병때 동급생끼리의 향도는 억수로 편하다. 우선은 불침번 순서를 짜니 난 빠질 수가 있고, 사탕과 담배를 배급하니 좀 꼬불칠 수가 있다. 그때는 담배가 1갑씩이 아니라 낱개비를, 사탕도 몇 개씩 나누어야 되니 적당히 하여 내 것을 많이 할 수 있을뿐더러 여러 가지 좋은 점이 많다.

우리 중대 91명 중 반 정도, 물론 소대에서도 반 정도는 우리 고향 친구 또는 선후배들이어서 군대생활은 아주 즐겁게 했다.

나의 용감한 노래덕을 본것이다.


참고로 덧붙여 몇 가지 더 쓰자면 입대한 다음날 축구 좋아하는 놈, 배구 좋아하는 놈 이렇게 구분하여 운동시합을 하는데 내가 소질이 있으니까 일주일쯤 지나 기초교육이 끝난 다음 운동부로 소위 스카우트되어 그 뒤론 거의 군대생활을 모르고 지냈다.

이래서 난 국가(를)대표(하여 육군 간부교육대) 배구선수가 되었다. 그리고 교육기간이 끝나고 일선 부대로 배치가 되었을 때에도 국가(를)대표(하여 육군 1사단) 배구선수로 계속 운동부 생활을 했다. 우리끼린 ()는 빼고 국가대표라 칭한다.


참 내가 운동부로 차출되어 갈 때 내 뒤를 이어 향도를 서로 하려고 나한테 집요하게 추천해 달라는 친구가 있었는데 결국 그 친구가 향도가 되었다. 나한테 고맙다고 PX에 몇 번가서 빵도 먹었다. 그 친구는 10여 년 전에 유명을 달리했다고 들었는데 이글을 쓰면서 불현듯 생각이 난다. 그 친구가 "시홍"이라는 친구다


아무튼 노래는 못하면서도 노래 땜에 생긴 에피소드도 많고 까불기도 많이 했다. 철없던 젊은 시절, 그 패기 왕성했던 추억이 너무나 새롭기만 하고 부럽기 만하다. 누가 이 나이가 이렇게 빨리 올 줄을 알았던가..


우리 아들은 내가 군대이야기를 하도 재미있게 이야기 해주고 하니까 정말 신나는 곳인 줄 알고 우선입영 신청을 해서 지 또래 중에 제일 먼저 뭔지도 모르고 같다. 그리고 군대생활을 하는 중엔 너무 힘이 드니까 애비한테 속았단다.

대부분 남자가 제대 후 군대 이야기를 30년 동안 써먹는다고 하는데 주로 말년, 그러니까 편하고 재미있던 이야기만 하거든……. 죽도록 X뺑이 친 이야기는 안하잖아……. 우리 아들놈 군대 이야긴 우리 동창들도 다 알려져 있다. 매주 면회 다니면서 하도 유별을 뜬것이 소문이 나서, 또한 아들 부대에 정훈 교육도 하러 몇 번 갔다가 교육이 끝나면 공개적으로 휴가를 받아 오기도 했지만 이 유명세 때문에 모범이 되어야 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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