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마다 돌이켜보면 만족스런 시절이 있을까…….
대부분이 후회스런 시절의 점철이었으리라
특히 내겐 그 중에서도 고등학교 시절이 그렇다…….후회만 남아있는…….
중학교도 상당히 우수한 성적으로 입학을 했다. 입학을 하고 나서 반장 부반장을 뽑는데 담임선생님이 성적순으로 하자면서 내겐 부반장이란다.…….그러니 전교 성적이 8등 이내였던 거 같다. 그런 내게 고등학교 진학을 앞두고 꽤나 열심히 했다. 진주에 있는 학교로 진학하려고 원서를 사겠다니 아버지가 안 된다고 하신다. 불과 며칠 전에 큰 싸움을 일으켜 문제를 일으킨 게 화근이다.
애비 밑에서도 이런데 객지에 보냈다간 도저히 사람놀이 못할 것 같다는 게 이유다. 하는 수없이 모든 걸 포기하고 고향 학교로 진학하기로 했다. 수산고등학교다. 난 뱃놈이 되기로 했다. 마도로스……. 마도로스가 되련다……. 망망대해를 주름잡는 그런 꿈의 사나이가 되련다. 공부해서 나아갈 길은 나하고 먼 것이다. 좌절과 꿈이 교차하는 많은 시간을 고민하고 내린 결정이다. 울 수도 없다. 오기 반 객기 반으로 결정을 했다. 그때부터 공부하고는 멀어지는 것 같았다.
어쨌든 입학시험을 보니 경쟁률도 좀 됐지만 그래도 자신감은 충분했다. 실업고등학교라 그만 그만 하기도 했지만 2등으로 합격을 했다.
여기서 내 꿈을 키우자. 바다를 주름잡는 사나이의 꿈을…….
그러나 주변 환경이 날 그대로 내버려 두질 않았다. 거친 친구들과 어울려 다니며 싸움질의 연속이었다. 원래 수산고등학교는 많이 거칠기도 하다. 선후배의 위계도 너무나 뚜렷하고.
그런데 어렵게 어렵게 지내는 중 1학년 2학기 중간쯤에 날 많이 괴롭힌 2학년 선배를 죽지 않을 만큼 두들겨 패버렸다. 그리고 뒷날 학교를 가지 않고 동태를 살펴보니 야단이란다. 학교부근뿐만 아니고 찾아서 날 죽여 버리겠다고 소문이 났단다. 학교를 계속해서 갈수가 없게 되었다. 매일같이 학교 간다 하고 집을 나와 방황의 연속이 이어졌다.
그리고 다음해 2월이 되니 퇴학이 되었단다. 그리고 이 모든 사실이 아버지께 들통이 나고 말았다.
물론 아버지의 분노는 이루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컸다. 장남으로서 기대도 컸는데…….
상심도 크셨으리라. 이런 부모의 심정을 성년이 되어서야 깨우쳤으니 이미 때는 늦은 것.
집에서 공식적으로 냉대와 질시 속에 2달을 보냈다. 아버진 학교 보낼 필요 없으시단다. 나도 체념하고 그럭저럭 도망갈 궁리만 생각하면서 보냈다. 그리고는 3월말 아버지의 분노가 진정이 되셨는지 조용히 부르시며 학교를 가라하신다. 보내 주시겠단다. 동내에서 십리 떨어진 신설학교에 보결로 입학하게 해 주신단다. 그리고 그 학교 교무주임 선생님이 인근 마을 분이셔서 어느 일요일 아버지는 나와 함께 그 선생님 집으로 찾아가 인사를 하고 전후 사정을 이야기하여 입학이 가능하다는 답변을 듣고 뒷날 월요일 학교로 가서 보결입학을 결정하고 돌아왔다. 학년 까먹음 없이 2학년에…….
그래서 몇 달 만에 어엿한 교복을 입은 학생이 되었다. 그때 그 교무주임 선생님이 몇 년 전 보건복지부 장관을 지내시고 지금은 국회 예산정책처장을 맡고 계시는 최광 박사의 부친이다. 이런 저런 연유로 지금도 최광 박사님과는 가깝게 지내고 종종 집으로 찾아가 인사도 드린다.
그러나 입학도 잠시뿐, 얼마 되지 않아 이 학교는 학교 분규가 일어나 수업이 진행되지 않았다. 2학년을 마치는 동안 거의 수업이 진행되지 않았다. 학생들의 데모에다 오만가지 싸움질만 일어나고 있으니 선생님들이 3학년보다 더 맹랑하고 말썽꾸러기들인 우리 2학년만을 개인별 선도 담당제로 하여 나에겐 교회 다니시던 영어선생님이 자원하여 지명하시고 집중적으로 선도하셨다. 나중 생각해 보니 내가 근본이 불량한 것 같지 않고 공부도 잘 시키면 아마 성과가 있을 거라 생각을 하신 것 같다. 그 선생님은 수없이 나를 불러놓고 좋은 이야기, 위인과 성인 이야기 하며 나를 선도하려고 무진 애를 쓰셨는데 지금 생각하면 무척 죄송하고 미안할 따름이다. 고등학교 졸업이후 한 번도 뵙지 못하였으니. 그 선생님 성함도 기억하지 못한다. 간혹 앨범을 보면 기억이 나지만…….
이렇게 허송의 2학년을 보내고 3학년이 되었다. 아버지는 그래도 교육자의 장남을 대학은 보내야겠다고 생각을 하셔서 여러 가지 걱정을 많이 하신 모양이다. 생각 끝에 내린 결정이 학교에 허락을 받아서 객지 입시학원으로 유학을 보내는 거였다. 어느 날 아버지와 함께 교장선생님을 찾아가 대입 준비를 위하여 서울로 학원을 갈수 있도록 허락해 달라고 요청을 하니 교장 선생님은 아버지하고 잘 아는 사이라 담인 선생님을 불러 내 성적이며 이것저것 물어보시고는 담임선생님이 다른 건 몰라도 수학은 아주 뛰어나게 잘 한다는 이야길 듣고 허락을 해 주셨다. 물론 매월 공납금은 잘 납부하고 12월 학년말 시험은 치른다는 조건으로.
다음날 어머니와 함께 서울 외삼촌네 집으로 출발을 했다. 난생 처음 서울을 본 것이다. 서울역에서 마중 나오신 외삼촌과 함께 택시를 타고 청계천 고가도로를 거처 가는데 이게 개울을 덮어서 길을 만들고 그 위에 2층으로 도로을 만들었다는 설명에 놀랍기만 할 뿐이다.
이리하여 뒷날 외삼촌과 함께 광화문으로 가서 학원에 등록을 하고 본격적으로 입시준비가 시작되었다. 아마도 첨으로 맘먹고 열심히 공부를 한 것 같다. 그러나 고등학교 2년여를 어영부영 지낸 나로서는 따라가기 무척 힘들었다. 그러나 열심히 하였다. 그리고 5월 달에 대성학원에 시험을 치니 불합격이다. 세상에~~ 학원도 시험 쳐서 간다는 말 첨으로 듣고 경험하였다. 다시 한 달을 단과 반에서 다니다가 6월에 다시 대성학원 시험을 봤더니 간신히 합격하여 종합 반에 등록할 수 있었다. 정말 부지런히 열심히 공부를 하였다. 아버지는 그때 매달 소문도 없이 상경하셔서 점검을 하셨다. 학원 계단 입구에 지켜 서서 계시다가 혹 담배라도 물고 들어서면 그날 저녁은 뒤지게 얻어터졌다.
그러나 한술 밥에 배부를 수 없는 건지, 내 한계가 그런 건지 그해 진학은 실패하고 다시 낙향하여 재수의 일 년은 집에서 보냈다.
너무나 아쉽다. 돌이켜보면 그 소중한 고등학교 시절을 왜 그렇게 보냈는지.
내가 결혼하고 나서 어느 날 아버지는 내게 이런 말씀을 하셨다.
재수하여 대학입학에 간신히 성공하여 합격했다는 연락을 받았을 때 너 때문에 한번 우셨고.
그리고 대학원 시험에 합격하였다는 연락에 또다시 우셨다고…….
그러면서 아슬아슬했지만 방탕의 길로 가지 않고 이렇게라도 사회인이 되어준 것이 다행이며 고맙다고…….
난 대학 졸업 후 회사와 고등학교 교편생활을 잠시 하다가 아무래도 더 배워야 할것 같아 결혼하던 해에 대학원 진학을 하였다. 지금 생각해 보면 늦깍이 공부열정이 생긴것 같았다.
결혼식을 올리고 신혼여행 후 시골로 내려가 동네 경로당에 인사차 아버지와 함께 술이며 안주를 짊어지고 방문하여 큰 절로 인사를 드렸더니 인사 받으시던 동수(洞首) 어른의 첫마디가 지금도 내 가슴에 생생히 남아있다..."현선생 큰아들이 사람되어서 좋은 규수도 데려오고 좋은 대학도 졸업하여 이제는 대학원까지 입학하였으니 복 받았다고..."
그리고 대학원을 졸업하고 학위를 받던 날 온 식구가 모였을 땐 처음으로 마음 편하게 웃으시는걸 봤다.
하지만 사실은 학원 다닐 때부터는 난 딴사람이 되었다고 생각했는데 아버진 끝까지 마음 조리셨던 것 같다.
이제 그 아버지께서는 교단을 떠나신 후 농사일로 소일하고 계시는데 자식 키우는 그 안타까운 마음을 이제야 내가 자식을 키우면서 깨달고 있으니 얼마나 우매한고…….
아버지...어머니...건강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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