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있는 건물은 대학의 본관에 있어서 대운동이 쫘악 내려다보이는 곳에 있다. 요즘 한주일 내내 캠퍼스 곳곳이 요란스럽기 그지없다.
시끄럽기도 하지만 전혀 개의치 않고 그 분위기에 편승하여 마음의 기쁨을 누리기도 한다. 간혹 환호성이 울리면 가슴이 두근거리기도 하고... 선수가 되어 함께 뛰어다는 모습을 상상하기도 한다.
뿐만이 아니고 저어기 한쪽에는 커플들이 또 다른 모습으로 젊음의 축제를 환호하고 있다.
어느새 30여 년 전의 나로 돌아가 끓는 피 주체 못하던 정열의 학창시절로 회상의 무대를 열어본다.
일 학년 때에는 기대와 호기심만 가득하던 때라 하숙집의 선배들 틈에서 합동 파트너 주선의 밀명을 양 어께에 짊어지고 간호 대학교 기숙사로 보무도 당당히 갔다가 진작 만나고 싶은 학생은 만나지도 못하고 무서운 사감 선생님한테 들켜서 훈계만 장시간 듣고 퇴짜를 받았다.
그 시절 우리학교는 공과대학만 있어서 여학생은 가물에 콩나듯 아주 귀하신 존재였고 인천은 대학이라곤 우리학교와 교육대학 그리고 간호대학이 전부였다.
우리하숙집은 그때 8명이었는데 4학년 선배가 3명 나머진 모두 나 같은 신입생들인데 선배가 나한테 대표를 위임한걸 보면 뭔가 이유가 있었을 텐데... 인물, 말빨... 혹여 그런거라면 선배가 고맙기도 한데... 그때 그 선배중의 한분이 지금은 KBS의 고위직인 국장으로 계신데 한번씩 만나 웃곤 한다.
참 그때 하숙집에서의 내 별명이 ‘살살이’이었는데 하도 웃기는 유머를 많이 해서 그랬던 것 같다.
우리들은 그 기대가 물거품이 되어 학교로 가지 않고 송도 뒷산으로 놀러갔다가 일군의 여대생들을 만나 그들이 해온 점심도 얻어먹고 한바탕 고고도 추며 즐거운 시간을 갖고 돌아왔다.
간호대학 교섭에 실패한 이유 때문에 이것도 징벌의 의미로 내가 맡았는데 다행히 잘 응해주어 체면이 어느 정도 섰다.
그리고 2학년 때에는 유신 정변이 일어나던 해인데 어떻게 보냈는지 기억이 별로 없고 3학년 때에의 일은 기억하고 싶지 않은 치욕이다.
군 입대를 앞두고 있던 때라 어떻게든 폼 나게 보내고 싶었는데... 그게 영 말이 아니었다.
학교는 종합대학이 되었지만 여전히 여학생은 품귀현상을 보였고, 앞에서의 이야기처럼 인천에서는 대학도 별로 없으므로 조달 창구가 여의치 않아서 이번에는 친구들과의 협의 끝에 교육대학으로 달려가 현장 조달을 하기로 합의하고, 그것도 내가 대표로 다녀오기로 하고 친구들은 학교에서 대기하고 있는데...
교대 정문에서 여학생 몇 명을 만나 이야기를 하고, 어느 정도 교섭이 이루어져 가는데 남학생이 오더니 나를 잠간만 보자고 한다.
자기를 간단히 소개하는데 학생회 간부인데 이번 기회에 우리학교 학생과 친교를 나누고 싶다면서 학생회 사무실로 가자기에 따라갔다.
당시 교대는 2년제 과정이므로 그 학생이 재수를 하지 않았다면 재수를 한 나보다 2살이 적은 셈이다.
그런데 따라 간곳은 그가 말한 학생회 사무실이 아니라 체육관이었다. 들어서니 여러 명의 학생들이 있었는데 다짜고짜 한방 주먹질을 하기에 나도 한 싸움 하는 몸으로 간단히 피했더니 우르르 모여들며 집단 폭력을 해 왔다.
그냥 간단히 말해서 죽지 않을 만큼 얻어터진 것이다.
이날을 위해 새로 산 옷도 갈기갈기 찢어지고 코에는 피 범벅이된 나에게 그들이 한말은 교육대학 남학생 자존심 건드리지 마라는 것이다. 이유인즉 그때가 교육대학의 남녀 비율이 역전되기 시작할 무렵이라 여학생들이 남학생을 좀 우습게 여긴다는 것이다.
그래서 3학년의 축제는 땡치고 6월 국가의 부름을 받고 입대를 했다.
그리고 제대를 하고 처음 맞이하는 축제, 체육대회... 군에서 자칭 국가대표 배구선수로 그 기량을 만방에 떨친 나에게는 대단한 절호의 기회이지만 아내를 만나기 직전이라 지금생각하면 아쉽다.
당시 선배나 선배 교수님들에 의하면 우리 전자과는 축제나 체육대회는 인연도 없고 관심도 없었다고 한다. 이런날은 그냥 술이나 퍼먹고 바닷가로 놀러 다니고 했단다.
참... 그런 이야기를 틈틈히 우리에게 주지시켜 주신 최병화 교수님은 재작년에 운명을 달리하셨는데 나하고는 또다른 애피소드가 있어서 그런지 그립다.
그런데 4강까지 피죽으로 올라오니 처음으로 생긴 실내체육관에서 있은 4강전은 우리 전자과 전 학우와 교수님 전부가 응원 나와 대단한 기세로 선수들의 사기를 채워주었다.
내가 생각해도 나는 신들린 사람처럼 잘했다. 묘기에 다름없는 롤링이나 슬라이딩 수비에... 넷트위에서 내리치는 공격은 가히 직업선수와 다름없었으니...
오죽했으면 4강전을 이기고 교수님이 운동하는넘이 전자과는 어떻게 들어왔냐고 하시며 좋아하신 모습이 떠오른다. 이때의 인상이 나중 대학원 입학 때도... 그리고 그 후 연구실 생활에도 좋은 이미지로 작용했던 것 같다.
이때 우린 승리의 기쁨을 술, 그때는 막걸리가 주류였는데 밤새껏 퍼마시고 모두들 곤죽이 되어 다음날 경기도 제대로 못해보고 깨지고 말았다.
그리고 졸업반 때에는 대부분 짝들이 생겨 그런지 잘 어울리지 않고 개별행동을 많이 해서 별로 재미없이 보냈다. 하기야 나도 그중의 한사람이긴 하지만...
오늘도 5층의 우리 사무실에서 운동장의 경기를 내려다보면서 그때의 그 기쁜 추억들을 회상해 본다.
그래서 이달 말경 송도 경제자유구역의 테크노파크로 새로운 사무실을 마련해 옮겨가지만 지금의 이곳은 제2 연구소로해서 계속 유지하려고 한다. 그래서 이곳의 젊은이들 속에서 싱싱한 氣를 끊임없이 공급받으려한다.
부럽당... 젊음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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