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이야기

나라 사랑의 길 - 외솔 최현배 선생님의 글

토끼나그네 2004. 5. 10. 10:21

 

내가 열 대 여섯 살 났을 적, 고향에 처음으로 차린 새 교육의 배움의 집 “사립 일신 학교”에 다닐 적에, 당시 구 한국 말의 “대한 매일 신보”에서 나라 정사의 날로 글러져 감을 개탄하며, 오적, 칠적을 타도하는 기사와 사설들을 읽고서, 목 놓아 울기를 밤 깊이 하였으며;  “만수 성절(萬壽 聖節)”의 경축에는, 제등 행렬에 참가하여, 노래하며 춤추기를 맘껏 하였던 것이다. 서울로 올라와서는 중학에 다니는 동안에는, 나라를 잃어버리고, 한없는 울분을 안고서, 사사로 주시경 선생을 쫓아 국어를 공부하며, 신채호 선생의 “충무공 전”을 열심히 읽었으며; 일본의 히로시마 고등 사범에 다닐 적에는, 학우들에게 민족의식, 조국 정신을 품고서 공부하는 것이 옳음을 설득하였으며; 동래의 사립 보통 학교에서 교편을 잡기 두 해 동안에는, 학생들에게 겨래 문화에 대한 심정을 기르기에 힘썼으나, 글러가는 세태에 불만의 정이 부풀어, 사회 개량, 겨레의 구원을 뜻하고, 다시 공부의 길로 들어가서, 찬 3 년 동안 일본의 대학을 마쳤으나, 큰 소득이 없는지라, 다시 대학원에 머물러, 일 년을 지내는 동안에, 전공 교육을 더 연구하는 한 편, “조선 민족 갱생의 도(朝鮮 民族 更生의 道)”를 지어, 고국으로 돌아와서 이를 “동아 일보” 지상에 육십여 회 연속 게재하여, 만천하의 동감을 얻었으며, 젊은 세대에게 큰 감명을 주었다.


연희 전문 학교 봉직 13년 동안에, 배달말의 연구와 교수에 심력을 기울였으며, 출렁대는 일어의 강열한 도치(倒置)에 홀로 버티고서, 우리말 찾기와 쓰기에 정성과 용기를 다하였다.


임이여 어디갔노 어디메로 갔단 말고

풀나무 봄이 되면 해마다 푸르건만

어찌ㅎ다 우리의 임은 돌아올 줄 모르나.


임이여 못살겠소 임그리워 못살겠소

임떠난 그날부터 겪는 이 설엄이라

임이여 어서 오소서 기다리다 애타오.


봄맞이 반긴 뜻은 임올까 함이려니

임을랑 오지 않고 봄이 그만 저물어서

꽃지고 나비 돌아가니 더욱 설어 하노라.


강물이 아름아름 끝난 데를 모르겠고

버들가지 출렁출렁 물속까지 드리웠다.

이내 한 길고 또 길어 그칠 줄이 없어라.


8.15 해방이 사흘만 늦었더라면, 나는 이러한 끝없는 망국의 한을 품은 채, 왜적의 총알에 쓰러지고 말았을 것이다. 천행으로, 해방을 얻어, 이 시조와 함께 옥중 사색의 열매를 가지고서, 세상에 나오게 되었던 것이다. 8월 19일 저녁에 서울로 돌아 와서는, 그 이튿날 아침 일찍이부터, 병든 다리를 끌고서, 안국 동 선학원에 동지들과 모히어서, 해방된 한배나라의 새 문화 건설의 의논을 하였고, 이어 동지들로 더불어, 한자 안 쓰기를 부르짖고, 한글만 쓰기를 외치며, 한글 가로쓰기를 주장하였으며, 국어교육의 진흥을 꾀하였다.


한글 문화의 재건과 민주 교육의 건설과 조국혼 교육의 기초를 닦고자, 미 군정청의 문교 부 편수 국에 들어가아, 삼십 륙 년간이나 애타게 그리고 목마르게 기다리던 한배나라의 재건을 위하여, 나는 나의 충성과 최선을 다하였다. 재직 찬 3 년 동안에 공무 시간을 사사로 허비한 일은 촌분도 없었으며, 신문을 들고서 일 분의 시간을 보낸 일이 없었다. 간혹 편수 국 관계의 기사를 들고 와서 말하는 직원에게 응수하노라고 신문을 들여다본 일이 있기는 하였으나, 그 허비한 시간은 삼 년간에 모두 오 분을 넘기지 아니하였다(이점은 피란중 주째 번의 편수국 시무 때에는, 시국 관계로 다소 달라짐이 있었다).

어떤 때에는 달을 등지고, 어떤 때에는 별을 이고서, 필 동 관사의 골목으로 걸어 돌아가면서, 나는 스스로 나에게 제 나라에 몸바쳐 섬김의 기회를 허여하신 하나님께 무한한 감사를 올리었다.


대한민국이 섬에 미치어 관에서 물러나와, 오로지 학글학회에서 그 운영과 사전 편찬의 사무에 힘쓰다가, 뜻밖의 6.25 사변으로 부산에 피란할새, 전란에 말끔 잃어버린 교과서를 다시 마련하고자, 두 번째 편수 국에 들어가서, 전역 새 판으로 편찬에 종사하던 중, 위태위태한 나라의 걱정이 가슴에 그득참을 부릴 수 없었다. 그래서, 먼저 “우리말 존중의 근본뜻”을 지어, 나라말에 대한 나의 충성을 세상에 전하고, 잇달아 “나라 사랑의 길”의 짓기에 손대었으나, 위선 목전에 급한 국민 도덕을 경장하고자, 먼저 “민주주의와 국민 도덕‘을 지어, 널리 학교 교육에 채용함을 입어, 도덕 교육의 선봉을 지었다. 그러나 ”나라 사랑의 길“은 그 뒤 여러 가지 사정으로 그 지음의 걸음걸이가 뜻같이 빨리 나아가지 못하여, 8 년만에야  겨우 이제 끝을 맺음을 얻었다.


요약하건데, 겨레는 나의 어머니이요, 나라는 아버지이다. 겨레가 아니고는, 나의 목숨을 타고 나지 못하였을 것이며, 나라가 아니고는, 나는 타고난 목숨을 누릴 도리가 없었다. 이 “나라 사랑의 길”은 나의 온 생애를 통하여 끊임없이 찾고 걷기를 힘써 온 생활원리로서, 겨레와 나라에 대한 나의 끝없는 사랑과 충성의 작업이다. 나는, 이로써, 하나는 겨레의 양심을 가진 이들에게 호소하여, 광복된 한배나라의 무궁한 독립과 건전한 발전을 촉망하며, 또 하나는 무궁무진히 달아나는 겨레의 새 싹 청년 남녀들에게 일러, 배달 겨레의 영구한 자유와 행복을 이뤄 누리기를 당부하는 바이다. 배달의 겨레, 대한의 국민은 잠시도 이 길을 떠나지 말지어다.


4291년 5월 15일 세종날, 세종 대왕의 거룩한 사업과 투터운 은덕을 받들어 그리면서,

                                                  노고 산방에서,

                                                  외솔 최 현배 적음.

 

이 글은 "나라 사랑의 길"을 감동으로 읽고 그 벅참이 넘쳐서 머리말을 옮겨 적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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