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6년 5월에 제대를 하고 복학을 할 때까지 몇 달간 집안 농사일을 돌보다가 8월 하순, 책이고 이불하며 짊어지고 인천을 왔다. 복학을 하기 위해서다. 도착하자마자 하숙집을 정하고 그길로 서점을 가서 성경책과 찬송가를 사서 곧장 교회로 가서 저녁예배에 참석하였다. 마침 수요일 예배가 있어서였다. 군에 있는 동안 훈련소에서 통신성경 공부를 주도하고 그 후론 그런대로 교회를 다니면서 제대 후에도 신앙생활을 하리라고 생각했었기 때문이다.
교회는 빠짐없이 잘 출석하였다. 청년부 활동도 참여하고 음치임에도 성가대를 하라기에 참여했다. 한 달 여 되었을 때 목사님이 내가 군에서 뛰어난 배구선수로 활동한걸 알고 인천시내 교역자(목사님, 전도사님)와 장로님들의 배구시합이 교단별(장로교, 성결교, 감리교, 침례교 등의 교단)로 있는데 나보고 전도사라고 하면서 장로교단 대표로 출전해 달란다. 일종의 부정선수인 셈이다. 10여개 이상 팀이 참가했는데 나의 역할이 커서 그랬는지 우리 팀이 어쨌든 우승을 하게 되었고 그 일을 계기로 여러 목사님과 친교하게 되었고 우리 목사님하고도 각별한 사이가 되었다.
내 성격 탓이기도 하지만 교회에 가도 어느 누구하고 특별히 친하게 지내는 사람도 없이 하숙집과 교회만 오가는 과묵한 청년으로 비춰지게 되었다. 요즈음엔 청소년들이 야구나 농구를 좋아하는 것 같은데 그 당시엔 배구와 탁구를 많이 했다. 특히 교회 간 시합이 종종 있었다. 난 우리 교회에서 배구시합이 있으면 자연히 빠지지 않고 어울리게 되었다. 그리고 겨울이면 탁구시합이 참 많았다.
그해 겨울도 우리 교회 내에서 탁구시합이 있었는데 난 탁구를 잘 하는 편이 아니라서 출전은 하지 않았지만 시합장에 갔다.
아 그런데, 남녀 혼성으로 하는 복식 경기인데, 자연히 누구누구와 조를 하는 건지는 눈여겨봐진다. 그러니까 지금의 아내 된 사람도 어떤 청년하고 조를 이룬 것이다. 그렇지만 누구와 사귀고 있는가도 아니고 교회 처녀에게 관심을 전혀 갖고 있지도 않았지만 내 눈에는 조를 이룬 사람들끼리 혹 사귀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 봤다.
그리고 겨울 방학이 되어 나는 고향으로 내려가지 않고 계속 학교 도서관에 나가 공부를 하고 또 한편으로 영어회화 학원에 다니고 있었다.
어느 날 학원을 마치고 돌아오는 버스에서 지금의 아내가 된 여자가 타더니 내 뒷좌석에 앉으면서 “안녕하세요” 하며 인사를 건네 길래 나도 답례를 하고 얼마 전 탁구 시합이 생각이 나기에 “요즈음도 탁구 많이 치세요”하고 이야기 했다. 그리고 같은 곳에 내렸다. 이것이 처음으로 내가 여자에게 일대일로 말을 걸어본 것이다. 내려서 “서울 장충체육관에서 배구경기가 있는데 같이 구경 가지 않겠냐”고 물었더니 그러자고 한다.
그리고 버스 정거장 앞에 있는 영화다방에서 내일 만나자는 약속을 하고 헤어졌는데, 다음날 시간이 되어 가보니, 어랍쇼, 다방이 쉬는 날 아닌가, 다방 앞에서 서로 기다리면 될 걸 어떤 연유에선지 그러지 못하고 되돌아 가버리고 말았다. 이렇게 처음 데이트는 비틀리고 말았고 다음 일요일 교회에서 눈치로 만나서 약속들이 이어져 갔는데 지금은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여기서 지금도 내가 주장하는 건 “당신이 내게 먼저 말을 걸었기 때문에 시작은 당신이 했고, 당신이 나를 꼬셨다”고 말하면 예의상 먼저 인사를 한건데 “꼬셨다”고 해석을 하면 너무 확대해석이라고 파안대소한다.
요즈음 청년들은, 우리 집 아이들을 보니까 그냥 알고 지내면서 자연히 암묵적으로 교제를 하는 게 아니라 구체적으로 “사귀자”는 합의하에 교제를 하지만 그 당시에는 이렇게 저렇게 몇 번씩 자주 만나면 암묵적 교제가 시작되는 것이었다. 우리는 이렇게 교제가 시작 되었고 만나는 빈도가 많아지니까 함께 극장도 가게 되고 교외로도 가게 되었다. 그러나 교회에서는 한 번도 눈길마저 주지 않았으니 아무도 몰랐다. 마침 그녀의 직장이 내가 다니는 대학교의 부속고등학교이므로 학교 캠퍼스에서도 만나게 되고 또는 내 하숙집으로 자주 놀러오게 되었다. 그녀는 글씨가 아주 좋아서 전공이 아닌 교양과목 같은 것의 리포트는 자료만 모아 놓으면 대신 정리하여 써 주는 일도 많았다. 그리고 4학년이 되고 1학기가 지나 2학기가 되었을 땐 서로 결혼상대로 인식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어머님께 인사를 시켜달라고 하여 아마도 4학년 때 연말쯤 인사를 하게 되었는데, 세상에 이런 일이, 인사를 드렸더니 첫마디가 만나지 말라고 하신다.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시고 엄하디 엄한 홀어머니 밑에서 자란 그녀였다. 아마 자기 딴에는 그 후로 엄청 졸랐던 모양이다. 어머니는 교회에서 믿음이 좋기로 이름난 권사님이었다. 그 후에 어머니는 목사님한테 그 청년이 어떤지 물어보시겠다고 하신 모양이다. 목사님한테 물어보면 당연히 후한 평가가 나올 것은 자명한 일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목사님에게 물어보니 목사님이 아주 훌륭하고 똑똑한 청년이니 염려마시고 사위 삼으라고 권하시니 그 후론 마음 놓고 교제를 할 수 있었다.
이제 남은 일은 우리 집에 허락을 받은 일이다. 나는 10월에 취업이 결정되어 졸업을 하기 전인 12월부터 대우전자에 출근을 하게 되었다. 그 당시에도 지금 같지는 않았지만 취업하는 게 그리 쉬운 일은 아니었지만 조기에 출근을 하게 되어 편안한 맘으로 지내고 있었다.
아버지께 사귀는 여자가 있다고 말씀을 드리고, 그해 연말에 회사부근의 다방에서 인사를 시켰다. 그렇게 밖에 할 수 없었던 것이 이제 갖 입사한 신참인데다 입사 동기들이 합숙을 하고 있었으므로 점심시간이 아니면 자유롭지가 못해서이다. 아버지는 인천에 사시는 고모님과 함께 오셨다. 아버지께는 4촌 누이가 되시는 그 고모님은 완전히 신식에다 화통한 성격을 갖고 계셨고 고모부는 한술 더하신 분이시다.
다방에 앉자마자 고모님은 아버지가 생각할 겨를도 없이 맘에 쏙 드는 처녀라고 칭찬을 하면서 아무소리 하지 말고 결혼 시키라고 하시며 아버지의 의중을 나중에 물어보신다. 아버지도 맘에 든다고 하시니 이제 허락을 받은 셈이다.
이렇게 하여 공식적인 교제가 시작되었고 다음해 졸업식 날 시골서 아버지 어머니 동생들 온 식구가 총 동원되어 모였을 때 모두들 첫 상면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졸업을 하고나서는 하숙생활을 접고 자취를 시작하였다. 그때 동생도 두 놈을 데리고 와서 함께 하였다. 한 놈은 대학생, 또 다른 한 놈은 대입 재수생이다. 매주 일요일이면 예배를 보고 함께 시장으로 가서 반찬거리를 준비하고 자취집으로 가서 김치도 담그고 했다. 이 일을 결혼 때 까지 했으니 결혼 일 년 전부터 신세와 도움을 많이 받은 셈이다. 참 지금 와서 밝히는 거지만 기억에는 반찬 준비하는 돈은 내가 낸 기억이 거의 없어 보인다. 월급은 받았지만 난 주머니가 항시 부족했다. 술을 많이 먹거나 해서 지출이 큰 게 아니고 돈이 생기면 뭐 연구하기위한 전자 부속품이나 책을 사는데에 대부분 지출을 많이 했다.
그 버릇은 지금까지 이어져서 요즈음도 자주 서점엘 가서 내가 필요한 책뿐이 아니고 아이들 책도 자주 사다 준다.
그리고 아내한테 늘 미안하고 고마운 것은 내가 군대를 가기 전까지 떨어지지 않고 항시 함께 하숙을 했던 친구 상희 이야기 인데, 지금 그 친구는 수원의 고등학교에서 교직생활을 성실히 하고 있다. 이 친구는 현역으로 가지 않고 소위 방위를 해서 나보다 졸업을 일 년 먼저 했다. 그런데 성적이 나쁜 것도 아닌데 취업이 되지 않아 낙향을 해버리고 내가 4학년 땐 연락이 잘 되지 않았다. 나도 취업이 확정이 난 10월에 그 친구 본가에 연락을 했더니 시골에서 공장을 다닌다고 한다. 그래서 바로 시골로 가서 그 친구 자취방에 가보니 도저히 볼 수가 없을 정도로 어려운 환경에 있었다. 노동자나 다름없었다.
그래서 친구를 설득해서 너 하숙비며 먹는 거는 내가 책임 질 테니 함께 올라가자고 꼬셔서 다음날 함께 올라와 함께 지냈다. 나도 학생인 주제에 하숙비는 어떻게 감당할라고. 그리고 친구의 취업을 위하여 사방팔방으로 뛰어 다녔다. 그러나 내가 졸업하기까지 5개월간 취직이 되지 않았다. 그때 친구의 하숙비를 그녀가 대어 주었고 하물며 함께 쓰고 다니는 이런 저런 용돈도 내게 많이 융자해 주었다.
그때 물어보니 시집갈 밑천으로 적금 든 것을 일부 헐었다고 해서 여간 미안하고 고마운 게 아니었지만 친구를 대하는 내 마음이 자기 딴에는 보기 좋았던 모양이었다. 그러나 그 친구는 졸업식 날 우리가족과 사진을 찍고는 먼저 하숙집에 들어가겠다고 해서 갔는데 저녁에 집에 오니 가방을 챙겨서 어디론가 떠나버리고 없었다. 아마도 친구는 더 이상 신세를 진다는 게 미안하기도 했거니와 난 대기업에 취업이 되어서 직장생활을 하는 게 보기 부끄럽기도 하고 민망했던 모양이다. 그리고 몇 달 후 연락이 왔는데 수원의 고등학교에 근무한다고 해서 얼마나 기쁘고 안심을 했는지 모른다.
졸업을 하고 아무래도 공부를 더 하고 싶어 대학원 진학을 할 요량으로 공부하기 좀 쉬운 학교로 직장을 옮길러니 그녀가 알선을 해 주어 고등학교로 확정이 되었는데 회사에 사표를 내니 안 된단다. 내가 유능했는지는 모르지만 이사님이 더 근무를 하란다. 그래도 말을 안 들으니 회사에서 연애 소문이 날 만큼 요란했던 터라 그녀의 학교로 연락을 하여 직접 만나서 사표를 철회시키는데 설득해 달라고 면담도 하고 사장님까지 날 특별히 호출 하여 계속 근무하라고, 몇 년 후 대학원 진학도 시켜 준다고 할 정도로 회사에서는 사표 땜에 유명세를 떤지라, 여자 입장에선 장차 신랑이 될 내가 무슨 대단히 유능한 인재로 생각했던 모양이다. 지금 물어 보지는 안했지만 완전히 속았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별난 우여곡절 끝에 사표가 수리되고 그녀가 소개해 준 고등학교로 5월부터 옮기게 되었고 다음해 대학원 진학도 무사히 달성하게 되었다.
1979년 1월 2일 결혼과 함께 대학원 진학을 하게 되고, 공부를 하려면 제대로 하고 싶어 입학과 동시에 휴학을 했다가 교직생활도 일 년 만에 그만두고 다음해(1980년)에 복학을 하여 아버지께 학비며 생활비며 얻어 쓰는 생활을 학위를 받는 동안 했으니 부모님께도 힘들게 했고 아내에게도 그 또한 힘들게 했을 뿐더러, 또한 공부한다고 매일 연구실에서 지낼 수 있도록 여러 가지로 배려해 준걸 어찌 잊으랴, 감사하게 생각한다.
일 년은 365일 아닌가, 나의 연애시절 3년여 동안에는 일 년에 400번 정도 데이트를 했다. 매일 만난 셈이다. 일요일은 교회에서 만났다가 저녁에 또 만나니 그 정도 되는 셈이다. 그렇게 많이 매일 만났지만 이 사실은 교회에서 아무도 몰랐다가 결혼한다고 1주일 전에 공개하니 한바탕 소동이 났단다. 그렇게 감쪽같이 연애를 할 수 있냐고. 멋있다고…….
이 글을 끝맺음에 꼭 감사하고 싶은 것은 기탄없이 장모님에게 믿음을 주신 목사님, 그리고 멋있게 연애를 시작해서 여기까지 왔는데 호강시켜주지 못함을 애석하게 생각하며 진실로 미안하고 고맙다는 걸 전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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