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에 대하여
바람, 말만 들어도 진저리나는 사람도 적지 않을 것이다.
얼마나 속이 썩었으면 아주 속골병이 들었다.
생각만 해도 몸서리다.
싸우고 미워하고 죽느니 사느니 사생결단,
몇 번 보따리를 싸기도 했다.
다시 돌아오고, 미련, 체념, 그래도 미운 정
고운 정이 쌓여가고, 그러는 사이 슬그머니 바람도 자고,
언제 그랬느냐, 평화를 되찾는다.
그런 와중에 아이들도 고맙게 잘 자랐다.
이젠 번듯하게 잘 산다. 금슬도 좋다.
이건 인간 드라마요 인간승리다. 솔직히 감동적이다.
그 어려운 날을 참고 견뎌 온 관용, 이해,
기다림과 인내가 가져다 준 축복이다.
이건 가히 초인적인 인내다.
보통 사람은 견뎌내기 힘든 고통이다.
그나마 한 번인가. 아주 시리즈로 이어가는 남자도 있다.
그래도 별 탈 없이, 큰 부작용 없이
마무리가 잘된 가정을 보노라면 신기하다.
굳건히 잘 견뎌 온 아내, 아이들,
그리고 시린 속 쓰다듬으며 끝내 돌아온 가장도 고맙다.
어쩌다 밖에서 낳아온 자식도 한 식구처럼
함께 잘 사는 걸 보노라면 정말 존경스럽다.
하긴 그 아이가 무슨 죄랴.
그렇게 한 세월 지나노라면 온갖 회한도 가시고
그 집에 웃음소리가 다시 들린다.
이게 인간 승리가 아니면 무엇이랴.
세계 어디에도 잘 없는 일이다. 실인즉
한국의 이런 바람 재우는 인습이
미국 학회에서 논의된 저기 있다. 이 글의 제목이
마치 논문 제목처럼 된 것도 그런 사연에서다.
미국의 가정 붕괴는 거의 절망적이다.
조금만 싫어도 이혼이다. 새 애인이 생겨도 끝이다.
참고 기다리지 않는다.
둘이 다정스레 드라이브하다가도 싫다,
내려! 하면 내려야 하는 게 미국이다.
살얼음판이다. 물론 그 명분은 아름답다.
사랑 없이는 함께 못산다는 것이다.
위선은 안 된다. 감성 위주의 생활이라
거기엔 이성적 통제나 인내가 없다.
의리, 체면, 아이들 걱정, 정도 없다.
오직 사랑이다. 이게 식으면 모든 건 끝이다.
이혼 공포증에 걸린 부부도 많다.
긴장 일색이다. 본인들의 정서도 말이 아니다.
더구나 아이들 문제는 심각한 사회 문제로 등장했다.
바람론이 대두된 데는 이런 딱한 사연이 있어서다.
미국엔 바람이란 말도 없다.
혼외정사라는 끔찍한 법률용어뿐이다.
거기에 비한다면 우리의 바람이란 말이 참 묘하다.
애교스럽기도 하고(진저리나는 사람도 있겠지만
어감에서 그렇단 이야기다). 바람핀다, 바람났다,
바람쟁이....... 바람은 잠시 불고 지나면 그뿐,
흔적이 남지 않는다. 그래서 바람이란 말로
부르게 된 걸까. 제발 그렇기를 빌었을 것이다.
실제로 일시적 일과성으로 끝난다는 보장만 있다면
옛말 우리 아낙들은 상당히 관용적(?)이었다.
바람이 잘 때까지 조용히 기다려야 하는 걸
부덕으로 알았다. 그런 풍조여서일까.
행세깨나 하는 남정네는 소첩 한둘 거느리는 것쯤
예사로 알았다. 그리고 객지에서 이른바
객기를 푸는 정도라면 남정네들 특권쯤으로 알고 왔었다.
그런가 하면 누가 봐도 쫓겨나 마땅한 여자도
삼불거(三不去)라 해서 함께 살았다.
쫓겨나면 갈 데가 없는 여자,
옛날에 함께 고생한 여자,
부모상을 함께 치른 여자는 삼불거라 해서
의리상 쫓아내선 안 되게 되어 있다.
칠거지악도 삼불거도 요즈음이사 웃기는 이야기다.
하지만 삼불거를 지켜온 조상네의 인간적 신의는
요즈음 세상에 되새겨 봄직하다.
정신과 임상에선 하도 어이없는 일도
많이 벌어지기 때문이다. 바람이니,
어쩌니 하기 전에 인간적인 의리마저 메말라 버린
남정네들도 더러는 있기에 적어 본 소리다.
각설하고 요즈음 남편 바람에
조용히 있을 부인은 그리 많지 않다.
인내의 폭도 관용도 많이 인색해졌다.
그리고 이젠 여자들 바람도 만만찮다.
이런 기세라면 바람의 주인공이 바뀔지도 모른다.
어느 쪽이 든 바람이 잘 때까지 참고 기다리는 것이
가정 붕괴, 아이들 문제 예방에
큰 공헌을 하고 있는 건 사실이다.
이것이 미국학회에서
진지하게 논의된 바람의 긍정적 효용론이다.
한국적 바람론과 미국식의 절대 사랑,
어느 쪽이 좋고 나쁘고를 말할 순 없을 것이다.
부부의 개인적 선택이니까.
[출처] 아담을 아느냐 / 이시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