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오래토록 남는 어머니에 대한 기억

토끼나그네 2004. 6. 14. 01:44
 

76년 5월에 군대를 제대하고 집안 농사일을 거들다가 2학기 복학을 위해 8월 하순경 인천으로 올라오려고 날짜를 잡아뒀다.


그 시절은 이미 농촌의 일손이 부족하기 시작되어서 품앗이로 농사일을 해야 했고  또 부분적으로도 농기계가 상당히 보급되어 있었다. 우리 집도 내가 어릴 적은 머슴을 데리고 있었지만 이때는 머슴을 할 일꾼도 없었다. 나라가 산업화로 시골의 젊은이들이 다 객지의 회사로 나갔기 때문이다.

그러니 아버지는 교직 공무원으로 농사에 전념할 수 없었고, 동생들도 여러 명 있지만 다 객지로 공부하러 나가고 없으니 내가 제대 후 잠깐 동안 농사일을 거든 것이 아니라 내가 다 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러니 어머니 혼자 농사일을 하게 하시고 객지로 떠나오는 게 여간 마음에 걸리는 게 아니었다. 그렇지만 별 수 있는가…….


그리고 그때 우리 집 형편은 경제적으로 그리 넉넉한 편이 못되었다. 그때만 하더라도 교육공무원의 월급이 크게 넉넉하지 않았고 나를 포함해서 대학생이 두 놈이나 되었고, 객지로 나간 고등학생도 두 놈, 그리고 고향서 학교를 다니는 막내인 중학생 한 놈이 있었다. 그러니까 객지로 나가서 학교를 다니는 놈이 네놈이나 되었으니 매달 보내는 하숙비 하며 아버지는 늘 걱정이었다.


우리나라의 태풍은 8월 달에 주로 피크를 이룬다. 물론 9월에 와서 벼가 다 익어 가는데 망쳐놓는 경우도 있기는 하지만. 그해도 8월 중순경에 큰 태풍이 왔었다. 2, 3일 있으면 집을 떠나려고 준비를 해놓고 있는데 밤이 이슥한데도 어머니가 외출하셨다가 오시지 않는 거였다. 태풍이 막 지나간 뒤라 비도 제법 오고 있는데…….


그렇지만 어디를 가셨는지 아버지도 모르고 아는 식구가 없다.

아버지와 함께 걱정을 하고 있는데 자정이 될 무렵에야 오셨다. 아니, 그런데 어머니는 무릎을 크게 다치셔서 피를 흘리며 비에 흠뻑 젖어 오셨다. 내용인 즉, 준비해 둔 내 등록금이 좀 부족하여 이웃마을에 돈을 빌리러 가셨다가 오시면서 비오는 밤길이 너무 어두워 넘어지셨는데 그만 개울에 빠지신 거였다고 하신다. 아버지는 동생 등록금이랑 해서 다 맞추어 놨는데 아주 급한데 가 있어서 그걸 좀 빼 쓰셨다가 그랬다고 하신다.


이럴 때 내가 무어라고 해야 하는가. 정말 울고만 싶었다. 사실 그 당시만 하더라도 시골의 우리 동네에는 몇 년에 대학생이 한명 나올까 말까하는 시절인데 우리 집에만 해도 대학생이 두 명이고 또 객지로 유학나간 고등학생이 두 명이나 되니 인근 마을까지 소문이 날만도 할 정도였다.


아버지는 교육자이시니까 자식들 공부를 많이 시키고 싶겠지만 어머니는 그 옛날 외정시대에 소학교도 제대로 못 다니신 분이 자식들 공부시키려는 욕망은 무척 크셨다. 방학 때도 고향을 가면 여기 오면 일하느라 공부도 제대로 못할 텐데 뭐 하러 왔냐고……. 일은 당신이 해도 되는데 일찍 올라가서 영어 학원이라도 열심히 다니라고 강권하신다. 참으로 신기할 정도로 자식들의 학문에 대한 배려가 크시다. 이게 어머니의 모정이고 참사랑이 아니고 뭐겠는가.


지금도 우리 아이들의 등록금을 생각할 때마다 그때 어머니의 일을 생각한다. 결혼 후 초창기에는 시골을 가면 차 트렁크에 뭔가를 채워 주시려는 그 모정의 마음을 한동안 깨우치지 못하고 “놔두시라고...”만 했는데, 내가 자식을 키워보니 그게 아닌 것을 알고부터는 주시는 대로 담아온다. 차가 출발해도 한동안 손을 흔들고 서있는 아버지 어머니의 모습을 바라보면 부모의 속정인 것을 깨우쳐 가면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