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뒷북짱... 무식하면 용감해진다?...

토끼나그네 2005. 12. 8. 03:27

해결이 되고 있는 건지 아니면 새로운 상황이 발생되고 있는 건지 구분하기 힘들만큼 도하 매스컴이 쏟아내는 희망의 황우석 교수 관련 뉴스는 침묵하는 민초의 발을 구르게 하고 있다.


그런데... 참으로 특이한 현상이 발생하고 있다.

MBC라고 하는 거대한 방송이 사과방송을 하고 나서 부터이다.

그 전까지는 다수의 국민들 그리고 네티즌이 오매불망 안타까워하며 절규할 때에 침묵하던 곳에서 드디어 진실의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과학자는 물론이고 언론이나 사회단체의 원로들이 이번 사태의 원인과 과정들의 잘못된 점을 지적하며 경고하기 시작했고 특히 다수의 언론은 이를 대서특필하여 MBC의 부당성을 지적하며 차별화를 시도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기에 더하여 그들은 정부에 대하여도 국가적 희망과 한국 초유의 세계적인 선도 기술의 보호에 방패가 되어 주지 않고 방관했다고 지적하고 있다.  그것도 경쟁적으로...

 

그러나 아무렇게나 원로를 향해 불만을 토로하기도 민망하다. 왜냐하면 근래, 특히 이 정권들어서는 386이니 486 하면서 워낙 잘난 사람이 많아서 원로들의 설자리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하물며 추기경이 한마디 한 고언(苦言)을 비위에 맞지 않는다고 총리라는 분이 맞받아 치는 형국이니 말이다. 그런데 그 총리라는 분은 젊어서 운동권 활동을 할땐 추기경을 우산삼아 방패삼았다던데...


그래서 이런 병리현상에 대하여 나는 뒷북문화라고 말하고 싶다.

일등도 꼴찌도 아닌 2등이 무난하고 좋다는 방관적이고 소극적인 문화가 우리 주변에 만연해 있다는 방증이기도 한 것 같다.

이러니 뻔한 이야기를 해야할때 안하고 주변만 맴돌다가 뒤늦게 부산을 떠니 뒷북짱이란 별명을 들을 만 하게 되어버린 셈이다.


이분들... 왜 진작에 그러지 못하고 뒷짐만 짖고 있었던가 말이다. 진작에 그 PD수첩인가 -이 이름은 입에 담고 싶지도 않지만- 하는 일군의 무식한 무리들에게 지금처럼의 용기 있는 지적을 하지 못하고 침묵했던가 말이다.


이분들이 담아내는 지적을 종합하면 이런 것들이다.

과학의 성과물은 과학으로 검증해야 하며 그것도 그 성과물의 지속적인 성과가 선행된 성과물을 자동적으로 검증하게 된다고 말한다.


연구란 어떤 현상에 대하여 관찰 그리고 그 관찰로부터 습득된 어떠한 가정이나 가설(Hypothesis) 그리고 그 가설을 논리적이고 타당한 방법으로 증명하는 과정이며 이의 모든 결과를 글로서 체계적으로  표현한 것이 논문이다.

이처럼 난해하고 난해한 성과물을 PD라는 직업이 검증하겠다고 덤벼들었으니 가관이란 이런 것을 두고 하는 말인 것 같다.


인문분야나 사회과학이 아닌 자연과학의 논문은 아무나 읽어 본다고 해석되어지는 게 아니다. 그 심오하고 전문적인 용어의 나열부터가 낯설고 어렵기 짝이 없다. 그래서 대학원 석사과정에 입학하면 제일 먼저 받는 훈련이 논문읽기이다. 어떤 이는 석사과정이란 논문 읽는 수련기간이이라고도 한다.


그래서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했던가.

학문의 기초지식마저도 없는 사람이 성과물의 결과만 검증하겠다고 연구실로 돌격했으니 이를 무어라 평가해야 하는지...

용감하다고 할까? 아니면 무식하다고 할까?


피그말리온 효과(Pygmalion effect)라는 게 있다.

피그말리온 효과란 한 개인의 기대가 현실로 드러나 다른 사람의 행동에 긍정적인 영향을 주는 것을 일컫는 말이다.


피그말리온은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조각가의 이름인데 뛰어난 조각 기술을 가졌던 그는, 자신이 만든 조각상과 사랑에 빠진 나머지 신에게 조각상에 생명을 불어넣어 주기를 간청했다. 그리고 신은 그의 간절한 소망에 감동해서 결국 그의 부탁을 들어 주었다는 이야기다.

 

그러니까 강한 바람이 기적을 일으킨다는 것인데 '지성이면 감천' '두드리면 열릴 것이다' 그리고 '하면 된다'의 강한 의지가 피그말리온의 다른 표현인 것이다.


그리고 피그말리온 효과에 대한 연구는 심리학과 교육학에서 먼저 시작되었다고 한다. 선생님으로부터 학습 능력이 낮다고 인정받은 집단과 학습 능력이 뛰어나다고 인정받은 집단 간의 비교에서 학습 능력이 뛰어나다고 인정받은 집단의 학습 성과가 실제로 훨씬 크다는 사실이 발견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피그말리온 효과를 생각하면서 이번에 사고를 친 PD들이 줄기세포의 연구가 허구라는 것과 국민적 영웅으로 인식 받고 있는 것에 대한 반감에 매몰되어 있지 않았나 생각해 본다. 즉 끝까지 파헤치면 뭔가 잘못이 있을 것이라는 확신 있는 피그말리온적인 환상이 그 출발점이라 생각한다.

물론 동기는 남 잘되는 것은 죽어도 못 보는 악의적인 제보가 출발점이지만 말이다.

 

보도에 따르면

미국으로 건너간 그들은 거침이 없었다. 수사권과 구속권을 가진것 처럼 피의자를 조사하듯 그들은 자신만만했고 "죽이러 왔다. 끌어내리려 이곳에 왔다"라며 굶주린 하이에나가  오랬만에 발견한 먹잇감을 놓치 않으려는듯 집요하게 순박한 연구원들을 물고 늘어졌다.


본래 PD수첩은 시사프로그램으로 사회적 부조리나 부정을 고발하고 파헤치는 프로이며 오랫동안 이와 같은 고발 프로를 진행하다 보니 PD들 또한 저항정신으로 무장된 투사적 성취에 도취되지나 않았는지 걱정스럽다. 마치 히틀러처럼 말이다.

 

이처럼 투사적 성취에 도취되면 터널비전(Tunnel vision)이라는 일종의 시각 장애에 빠질 수 있다.

터널비전은 말 그대로 어두운 터널 속에서와 같은 제한된 시야를 뜻한다. 상하좌우 주변은 볼 수 없고 오직 빛이 있는 터널의 끝 부분만 보인다는 얘기다. 종이를 원통으로 둥글게 말아 한쪽 눈에 대고 사물을 보면 터널비전과 같은 상황을 체험할 수 있다.


이처럼 의학용어인 터널비전은 부정적인 측면이 강하다. 특정 사물이나 목적에 대하여 외곬으로 집착하거나 어떤 일에 열중하면서 주변 상황판단을 못할 때 터널비전에 빠져들었다고 말한다. 언론기관이나 수사관들이 특정 사안에 대해 주관적인 결론을 내려놓고 이 결론과 합치되는 증거자료만 수집하는 등의 방식으로 취재 및 수사를 진행하는 것이 일종의 터널비전이다.


그러니 난자제공의 윤리성과 함께 줄기세포의 성과물이 부정적이라는 결론을 설정하고 그 설정에 적합하게 취재하는 터널비전 함정에 빠졌을 것이다.

오로지 자신들이 지향하는 목표만 응시한 채 주변의 희생과 손실은 아랑곳하지 않는...


난자제공의 윤리성은 "생명은 하나님만이 만들 수 있다"는 생명사랑과 하나님 경외에서 시작된다.

그렇지만 기독교계의 거두이신 강원용 목사님의 12월 1일자 기고문 “난치병 치유도 ‘생명윤리’다”가  또 다른 해답을 주고 있다.


“난치병 치유도 ‘생명윤리’다”의 일부를 인용하면...

 

거짓말은 선이 아니다. 그러나 환자를 위한 의사의 거짓말이나 적군에 사로잡힌 자가 조국을 위해 하는 거짓말은 악이라 할 수 없다. 히틀러의 폭정에 의해 수많은 사람, 특히 유대인들이 죽어갈 때 독일의 신학자 디트리히 본회퍼는 히틀러를 암살하려다 발각되어 사형을 당했다. 그가 죽은 후 누구도 그를 살인음모자라고, 죄를 지었다고 욕하지 않는다. 전쟁 중에 사람을 죽이는 일은 나쁘지만 포악한 적이 침략해 올 때 전쟁에 참가하여 침략자를 물리치는 것은 죄라고 볼 수 없다.


나는 이런 시각에서 이번 ‘난자’ 논쟁을 본다. ‘난자’ 논쟁이 생명을 아끼려는 데서 제기된 윤리문제라 할지라도 눈에 보이지 않는 세포덩어리의 생명을 존중하는 일과, 난치병으로 골수에 사무치는 슬픔과 고통을 겪고 절망 상태에 빠져 있는 수많은 환자와 그 가족들을 치유하고 돕는 일, 둘 중에 어느 것이 더 윤리적인가. ‘거짓말’ 문제도 어떤 상황에나 똑같게 적용할 수 없다. 한국의 문화 풍토에서 난자 제공자의 요청에 따라 그 비밀을 지켜 주는 것이 당연히 윤리적이라고 생각한다.

------


들끓는 애국적인 안타까움을 도도히 바라보며 이것도 시대의 숙명적 아픔이라고 하기에는 잃는 것이 너무도 큰 것 같아 서글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