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통곡하고 싶은 세상...

토끼나그네 2005. 11. 28. 01:44
신바람 나는 세상

정말 신바람 나는 세상은 어디쯤 있는가. 아니면 언제쯤 올 텐가...

요즈음... 세상 돌아가는 모양새가 늘 소화불량이다. 뉴스로 생산되어 나오는 소식들이 차라리 듣지 않았으면 하는 것으로 가득하니 세상이 절망냄새로 질식 될 것 같으니 말이다.


한동안 희망메카로 불리던 황우석박사의 줄기세포 이야기가 방송의 윤리 논쟁으로 찬물을 끼얹었다고 세상은 온통 벌집 쑤신 듯하다. 그런데 그 이면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지극히도 불량한 동기에서 취재가 되었다나... 취재가 윤리문제에서 출발한 것이 아니라 연구가 허구였다는 설정 하에서라고 하니 역시나 한국임에는 틀림이 없는 모양이다. 우리 속담에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그것뿐인가... 지난번에 수도를 옮기는 문제로 시끄럽더니 이번에 행정도시문제로 아우성이고 충청도를 제외한 다른 시도는 상응한 반대급부를 주장하려고 한단다.  아마 모르긴 몰라도 이 욕심거리 정리하고 잠재우는데도 한참은 걸릴거고 어지간히 요란스러울성 싶다.

그것에 더하여... 수도와 행정도시의 차이... 참으로 묘하지 않은가 말이다.


또 있다.

남의 통신 내용을 엿들었다는 이른바 도청사건. 신문지상에 핵폭탄급이 어딘가, 누군가에 있다고 흘리면서 백성의 호기심을 자극하고 있으니 그저 우매한 민초야 손익이 없는 이야기이기는 하지만 호기심과는 달리 즐겁지 않는 게 아니라 스트레스만 쌓이게 한다. 그래서 누군가에게 이솝 우화에서나 나올법한 신나고 즐거운 희망 낚는 이야기가 없는지 졸라보고 싶다.


그래서 이럴 때엔 울고 싶지 않은가. 아니 통곡하고 싶지 않은가.

이쯤, 세상을 탓하며 통곡하고 싶어 허균(許筠)의 “통곡하고 싶은 세상”의 글을 인용하여 달래려 한다. 알려진대로 허균은 홍길동전의 작가로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문장가이지만 요새말로 삐딱하게 산 덕분에 질곡이 많아서인지 통곡하고픈 일이 많았던 모양이다. 


그때도 그랬는가...

세상에 대한 비분강개의 속내가 절절히 녹아있는 있는데 무릇 통곡으로 소일 하려는 듯 통곡헌(痛哭軒)이라는 집까지 지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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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조카 친()이 서실을 짓고는 통곡헌이라는 편액(扁額)을 걸었다. 사람들이 껄껄 웃으며 말했다.

“세상에는 좋아할 만한 일도 매우 많은데 어찌하여 통곡한다는 뜻으로 집의 편액을 삼는가? 하물며 통곡한다는 것은 아버지를 잃은 자식이나 남편을 잃은 지어미가 목을 놓고 우는 것이다. 사람들은 그 소리를 듣는 것을 매우 싫어하는데 그대는 홀로 사람들이 꺼리는 것을 거스르며 그 글자를 거실에다 걸어두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이에 친이 대답하였다.

“나는 세상이 등지는 것을 등지고 시속이 좋아하는 것을 어기는 사람이다. 세상이 기쁨을 즐기기에 나는 슬픔을 좋아하고 시속이 기뻐하므로 나는 또 슬퍼한다.

부귀와 영화도 세상에서 좋아하는 것이기에 나는 그것을 버리고 오직 천하고 가난하고 궁색하고 검약한 것 따위를 가까이해서 그것을 내 곁에 둔 것이다. 그래서 세상에서 가장 고약한 것을 고르다 보니 통곡보다 더한 것이 없으므로 나는 이것을 나의 집 편액으로 삼은 것이다.“


내가 이 말을 듣고 비웃는 여러 사람에게 충고했다.

“무릇 통곡도 도가 있는 것이다. 대개 사람이 일곱 가지 정(七情, 기쁨, 성냄, 슬픔, 즐거움, 사랑, 미움, 욕망)을 쉽게 움직여 나오는 것에 슬픔보다 더한 것이 없다.

슬픔이 지극하면 반드시 통곡이 나오는 것인데 슬픔이 오는 것은 여러 갈래다.

 

그래서 

세상일을 어찌해볼 수가 없어 슬퍼하며 통곡한 사람은 가의(賈誼)였고,

흰 실이 바탕을 잃은 것을 슬퍼하여 곡을 한 사람은 묵적(墨翟)이었고

동쪽 서쪽의 갈림길을 싫어하여 통곡한 사람은 양주(楊朱)였고

길이 막혀서 통곡한 사람은 완적(阮籍)이었고

세상 돌아가는 꼴이 어이없음을 슬퍼하여 스스로 사람 없는 곳에 살며 통곡의 뜻을 붙인 사람은 당구(唐衢)였다.


이들 몇 사람은 모두 품은 생각이 있어 통곡한 것이지 헤어지기 싫거나 억울함을 품거나 해서 눈물이나 짜는 아이나 계집의 통곡을 본받으려 한 것은 아니다.

오늘날의 세상은 저 몇 사람이 살던 세상에 견주어 말세라고 할 수 있겠다. 나랏일은 날로 글러지고 선비의 행실은 날로 경박해져서 벗을 배반하고 등쳐먹는 것이 마치 길이 갈라져 천리나 어긋나는 것보다 심하다.


또한 어진 선비가 곤욕을 치르는 것이 길이 막혀서 허덕이는 정도가 아니라 사람의 흔적이 끊긴 곳으로 도망치려는 것이니 만일에 옛 군자들이 이 세상을 목격한다면 어떤 생각을 품을지 모르겠다.

아마도 통곡할 겨를도 없어서 모두 굴원(屈原)과 같이 끌어안고 모래에 혀를 박고 죽으려 들것이다.


친이 집의 편액을 통곡으로 달아둔 것도 이런 뜻에서 나온 것이니 여러분은 그 “통곡”이라는 글자를 너무 비웃지 않았으면 좋겠다.


비웃던 사람들이 말귀를 알아듣고는 물러갔으므로 이것을 기록하여 여러 사람의 의심을 풀어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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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세상이 뭔가 체한 것 같이 답답함에도 뉴스 판을 장식하는 사람들은 모두가 잘난 사람들뿐이고 그 잘난 사람들 또한 "내탓이오"라며 가슴치는 이 없으니... 그렇다면 잘못한 이는 우리 민초뿐이지 않은가.

 

그러니 나라도 통곡헌이라는 편액을 내걸고 수고로운 인생길에서 한바탕 통곡이라도 해야 하는것은 아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