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죽음을...
지난 일요일(10월16일)부터 토요일까지 이레 동안 부음 4건과 혼례 청첩 2건이 날아들었다. 혼례 청첩이야 알고 있는 거지만 부음은 벼락같은 것이니 참으로 황망하였다.
부음이 특별한 것도 아니고 간혹 있는 것이지만 이번에 받은 부음 중 2건은 전혀 예상치 못한 것이니 이걸 어쩌랴...
첫 번째 부음은 일요일 새벽에 날아든 말 그대로 비보다. 가장 가까운 고향 친구가 새벽에 뺑소니차에 치어 유명을 달리 했단다.
서울과 부산 그리고 고향 친구들이 함께 만나는 행사에 참석했다가 그런 변을 당했다는데... 나도 참석해야 하지만 서울서의 또 다른 행사 때문에 그곳에 가지 못했다.
지난 8월에 지리산 휴가도 같이 다녀왔는데... 참으로 예기치 못한 비보다. 고향으로 내려가 장례를 치르고 올라오니 다음날 처남의 장인어른이 별세 했다는 부음이 왔다. 아흔이 넘었으니 호상이란다.
처남은 형이 있는데도 유별나게 누나인 아내와 나를 좋아하고 따른다. 그리고 문상을 다녀와 하루를 자고 나니 외삼촌이 돌아가셨다는 부음과 또 고향 친구의 모친이 돌아가셨다는 부음이 날아든다.
외삼촌은 일흔셋이지만... 건강에 별 문제가 없으시다고 들어왔는데, 마음이 많이 어지럽다.
결혼식 참석은 불가하니 개별적으로 전화를 해서 인사치례를 하고 고향으로 내려가 외삼촌의 장례를 치르고 돌아왔다.
참으로 바쁜 한주이기도 하지만 오고가며 수없는 생각에 잠기게 한 여정들이었다.
사실 죽음이란 누구에게나 찾아오는 지극히 일반적인 사실임에도 사람들은 죽음이 자신의 생활과는 무관한 일이라고 생각하거나 먼 미래의 사건쯤으로 생각하는것 같다.
동서고금 역사를 통틀어도 성현군자는 물론이고 영웅호걸도 세계적인 부호도 모두 이 세상을 떠났다.
그러니 어찌보면 우리 모두는 죽음을 바라보며 바둥거리며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오늘날에 와서는 과학과 의술의 발달로 사망자 대부분이 노인이기 때문에 그러는건가...
죽음을 내 일이 아닌 다른 사람의 일쯤으로 여기는 대단히 오만하고 이기적인 생각을 하고 있지는 않는지 반성하며 돌아보고 싶다.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죽음과 친숙해 질 수 밖에 없고 동시에 평범한 것으로 여기는 것이 유별난 것이 아니라는 생각에 이런다. 이 죽음의 평범함이란 짓궂은 생각도 아니며 재수 없는 생각은 더더구나 아니다.
이것은 고대사회에서 죽음을 인간의 자연스러운 ‘현상’이자 삶의 자연스러운 연장선의 끝으로 받아들였던 것처럼 말이다.
요즈음 ‘죽음학’이 크게 대부되어 죽음의 본질적 이해에 대한 관심이 커져가고 있다. 이것은 죽음을 큰 공포로, 전혀 생각하기도 싫은 암흑으로 인식되어 온 것을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고통 없이 편안하게 죽을 수 있는가와 또한 이에 대한 이해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없앨 뿐만 아니라 삶에 대한 진지한 성찰을 하게 한다고 한다.
현대 사회학의 거장인 노베르트 엘리아스(1897∼1990)는 ‘죽어가는 자의 고독’에서 서구문명사회가 죽음과 노화를 은폐하고 젊음과 건강을 강조하면서, 늙음과 죽음에 대한 부정과 왜곡된 공포가 죽어가는 인간을 고독과 절망 속에 빠뜨렸다고 비판했다.
그러므로 죽음의 의미와 사후에 대한 분명한 시각이 필요하며 죽음의 순간을 잘 맞이해야 하는 또 하나의 이유는 죽음이 생명의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라는 믿음 때문이다.
죽음에 대하여 불자는 6문도의 윤회에서 천상극락을 희망할 것이며 크리스천은 세상 마지막 날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의 승리를 기도할 것이다.
장남된 나로서는 부모님의 사후에 대한 생각을 소홀히 할 수 없는 노릇...
묘지 등에 대하여 내놓고 상의 드리기에 난처해 있는데 아버지는 화장 납골하라는 분부를 하셨다. 그러나 어머니 생각은 다르시다. 그냥 화장하여 바다에 뿌려주고 묘를 쓰지 말라신다.
어머니의 무묘풍장(無墓風葬) 주장은 이렇다. 장차 세계가 지구촌이 되어 어느 곳에 살지도 모르는데 묘 때문에 발길이 불편해서야 되겠느냐고 하시며 너희들이 있는 곳이 묘(墓)이니 마음만 담으면 된다는 것이다.
그동안 내가 외국 나들이가 많은 것과 셋째가 외국에 나가서 살고 있으니 아마 그런 것이 마음에 새겨지셨나 보인다.
이런 말을 들으신 아버지는 참으로 시대를 뛰어넘는 생각이라고 칭찬을 하시지만 정작 당신은 묘가 없는 것은 아무래도 성에 차지 않으시는 모양이다.
한편으로
나는 아름다운 죽음의 일환으로 장기를 기증할 결심을 하고 있다. 아직도 화장(火葬)을 두 번 죽이는 것이라며 거부하는 사람들을 많이 본다.
그러니 장기 기증이야말로 어림없는 일이겠지만 바꾸어 생각하면 흙으로 돌아갈 육신이 새로운 생명되어 부활한다면 얼마나 아름다운 죽음인가 말이다.
아내에게 조심스럽게 의견을 물어보니...
세상에 사는 동안 크게 공도 세우지 못하고 죽는데... 썩어 없어질 육신을 희망의 생명체로 다시 태어나게 하는 것보다 더 휼륭한게 어디 있겠냐고 하며 장기기증은 희망을 나누고 생명을 나누는 가장 본질적인 것이니 자랑할 것도 아닌 사랑의 실천이라며 나보다도 더 적극적이다.
조만간 아이들한테 의견을 구하여 가능하면 우리 가족 모두가 장기를 기증하고 함께 기념 여행을 하려 한다.
아름다운 죽음...
아마 이런 죽음도 아름다운 죽음이 아닌가 한다.
오늘 어느 신문에 보도된 충청도 한 시골의 목사는 ‘내가 죽은 뒤 나에 대한 어떠한 흔적도 땅 위에 남기지 말라’는 유언을 남기고 이 세상을 이별했다고 한다.
그의
유언장 중 일부를 보면
오늘까지
주변인으로 살게 된 것을 감사 하고,
모아 놓은 재산 하나 없는 것을 감사하고,
목회를 하면서 호의호식하지 않으면서도 모자라지
않게 살 수 있었음을 감사하며,
이 땅에서 무슨 배경하나 없이 살 수 있었음을 감사하고,
앞으로도 더 얻을 것도 없고 더 누릴
것도 없다는 것에 또한 감사하노라’라고 적어 가난한 목사였지만 행복했음을 이야기 하고 있다.
죽는다는 것...
이것은 인간의 운명이기도 하지만 열심히 살다가 잘 죽는 것은 다른 동물과는 달리 인간에게 주어진 특권이기도 한 것 아닌가.
우리의 삶이 한 번뿐인 유한적인 운명임을 깨닫고 또한 나의 생활이 매일 죽음과 더불어 살아가고 있음을 인식할 때 내 삶이 더욱 소중하게 느껴지며 충실하게 적극적으로 살도록 최선을 다 할 수 있으리라.
그리고 아름다운 죽음을 소망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