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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아이의 패션 쇼...

토끼나그네 2005. 9. 12. 18:51
 마누라 자랑과 자식 자랑은 팔불출(八不出)의 둘째와 셋째라던데...


지난 9일은 무슨 졸업식도 아니고 엄청난 상을 받는 시상식 자리도 아닌데 며칠 전부터 식구들이 다 참석해야 한다는 딸아이의 통지에 기대와 함께 지냈는데


이 학교의 축제나 잘나가는 가수들의 공연에 널리 알려져 있는 평화의 전당에 7시까지 도착하라나...

전날 어미한테 아빠는 무슨 옷을 입고 오실 거냐고  묻더란다. 왜냐하면 전에는 항시 정장을 입었는데 인천에 개발실을 오픈하고 부터는 케쥬얼만 고집하고 있기 때문인데... 아마 정장을 입으실 거라고 일러줬단다.


괜찮은 꽃을 준비하라는 아내의 지령에 따라 장미꽃으로 한 다발 준비하고 그리고 딸애 체면 때문에라도 정장을 폼 나게 차려입고 아들이 운전하는 차를 타고 가는데 이날따라 왜 그리도 밀리는지 연방 전화가 오고 야단이다.


이렇게 소란을 떤 것은 바로 딸아이의 졸업작품전인 패션쇼가 열리기 때문이다.

수능시험이다 입학시험이다 하던 때가 얼마 되지 않은 것 같은데 벌써 졸업이라니... 그것뿐인가, 2학년을 마치고 어학연수다 하여 1년을 휴학하고 드디어 졸업작품전이라니...


외국 출장이라도 가면 외국의 패션잡지나 서적들을 잔득 적어주며 사오라고 하고 집에서도 케이블의 패션쇼를 틀어놓고 적잖이 보면 항상 “공부 좀 해라... 맨날 TV만 보냐”고 하면 아내와 딸애는 이게 공부하는 거라고 대꾸했는데...


처음 입학을 했을 때 재봉틀을 산다고 하기에 함께 가서 좋은 걸로 사와서 기본기는 내가 다 일러줬고 한동안 학교 숙제는 내가 재봉질을 해 줬더니 아주 잘했다고 교수님한테 칭찬을 도맡았다나...


간혹 아버지 옷이나 한번 만들어 주라... 제일 쉬운 것으로 말이야... 하며 놀리기도 했는데... 이넘이 애비 모르게 자기 남자친구 한복을 한 벌 해 줬다나... 그런데 못 믿을건 아내도 마찬가지라.. 이 한복은 어미랑 한통속이 되어서 해 줬다나...


나는 전날까지도 “옷 비슷하게는 만들었니...” 하고 놀리면 딸애는 억울하다면서 일단 패션쇼장에 와서 보란다.


방학 내내 학교에 가서 작품 한다고 애를 쓰더니만... 어떨 때는 밤을 새우기도 하고... 그 수고의 열매를 보는 거라 대견하기도 하다.


리허설이 있던 날 딸애는 기쁜 듯이 자기 옷을 입을 모델이 톱 모델로 바꾸었다고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어미한테 하는 이야길 곁에서 듣고는 그런대로 만들었나 생각하기는 했었다.


원래는 보통의 별로 알려지지 않은 모델이었는데 리허설이 끝난 뒤 교수님의 지시로 톱 모델이 입고 다시 품평을 해 줬단다. 딸애의 표현을 빌리자면 작품이 좋아서 그런 거란다. 게다가 리허설이 끝난 후 모두들 입을 모아 최고의 작품이라고 감탄을 했다고 한다.


간신히 시간에 당도하여 보니 무신 사람들이 이렇게 많이 우글대는지.

여기서도 많이 가줘야 하는 체면 때문인지 가족 외에 친지나 친구들인 축하객으로 평화의 전당은 만원이다. 이미 무대 중앙의 앞쪽은 들어갈 틈도 없이 통제를 시작 했지만 나의 폼 나는 위세에 눌린 건지 교수석에 우리 식구들은 쪼개고 자리할 수 있었다.


팡파르가 울리고 몇 가지 멘트에 이어 TV에서나 보던 모델들의 워킹이 시작되는데 조명과 음악이 어우러져 썩 멋졌다.



이런걸 처음 보는 나로서는 나이 들어 아이들의 세계에 푹 빠진다. 나뿐이 아니라 부모로 참석한 많은 이들이 자기 새끼 땜에 억지로라도 흥에 빠졌으리라.

모두들 사진 찍기에 바빴고 지 새끼것이 언제 나오는지 눈을 땡그리고 쳐다본다. 나는 첨부터 전체를 캠코더에 담아둘 요령으로 그럴싸하게 찍고 있다.


드디어 아내가 허벅지를 찌르는 게 딸애의 작품이 나온 모양이다. 우아한 모습으로 나타난 모델의 돌아서는 워킹이 못내 아쉽다.

이처럼 의상을 전공한 새끼를 키우니 어쨌든 패션쇼도 보고... 참 재밌다.


쇼가 끝나고... 디자인한 학생들이 무대 위로 걸어 나오니... 무대는 삽시간에 수라장으로 변한다.

모두들 들고 온 꽃다발을 안기려고 일시에 법석을 떨었으니, 아들넘도 지 동생을 찾아서 무대로 뛰어가고...


대상 발표를 하려고 할 때 전날 딸애의 이야기도 있고 해서 내심 기대를 했건만 2개있는 상중에 하나도 건지지 못했으니... 많이도 아쉽다.


내 뒤쪽에 앉은 일군의 교수들께 그동안 잘 가르쳐 주셔서 감사하다고 인사를 하니 누구 아버지냐고 묻는다. 딸애의 이름을 대니 입에 발린 칭찬을 하는데 내 속으론 “내가 봐도 최고던데... 흥, 상이나 좀 주지, 웬 이상한 작품에다 주고 말이야...”


나중에 들은 이야기로는 작품성 보다는 기발한 아이디어에 점수를 줬다나... 그러니 내 눈에 무슨 스펀지 같은 걸로 만든 이상한 옷에 상을 줬는가 보다.


옹기종기 모여 사진을 찍고... 딸애도 수십 명의 친구들이 꽃다발 하나씩을 사서 들고 축하하러 온 걸 보니 다들 많이 안 오면 쪽팔릴까봐 불러 모은 모양이다.


대상을 받은 아이가 일부러 찾아와서 위로를 건넨다. “네가 받을걸 내가 받은 것 같다고...” 그 대상을 받은 남자 아이는 아침에도 그랬단다. “아무래도 대상은 네가 탈것 같으니... 한턱 단단히 쏘라고...”

그래도 딸애는 날 위로 한답시고 “아빠, 우린 학생들이라서 착상을 본거야... 나도 잘 할 수 있어”

 

그래도 참 대견하단 생각만 든다. 맨 놀기나 하는 것 같고... 잡지나 보는 것 같더니만 그래도 옷이라고 만들어 패션쇼를 하니... 어찌 대견하지 않을꼬...


이제 내 색소폰 실력이 절정에 이르렀을 때 입고 부를 폼 나는 옷을 주문해야지... 그래서 은퇴한 후에 내 색소폰 소리가 필요로 하는 곳에 갈 때 입고 갈 근사한 옷을 말이다.